일러스트=이철원

[박은식의 보수주의자의 Rock] '반일 시위' 밴드는 왜 급히 악기를 숨겼을까

류진창2 2025. 5. 11. 21:36

박은식 내과 전문의
입력 2025.05.09. 00:25

일제 불매운동 시위대 밴드, 검정 테이프로
일본산 악기 로고 가렸다가 조롱거리 전락
어릴 때 친구 권유로 일본 록 음악에 매료
정서적으로 먼 나라가 노래 덕에 친숙해져
反日 이용한 정치선동도 휩쓸리지 않게 돼
정치적 이익 얻으려 문화예술 갈라치기 말라

일러스트=이철원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 서태지가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언론은 충격에 빠진 팬들의 과격한 행동을 연일 보도했다. 어린 나는 놀라움과 호기심 속에 그 뉴스를 지켜보았다. 대체 이 사람의 음악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걸까. 그 궁금증은 내게 새로운 음악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결국 난 서태지의 팬이 되었고, 그가 영향을 받았다는 록 그룹들을 찾아 들으며 자연스레 록이란 장르까지 좋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기타를 함께 배우던 친구가 일본 록그룹 ‘X-japan’의 CD를 내밀며 말했다. “서태지도 좋지만, X-japan을 들어봐. 끝내줘. 너 서태지가 왜 ‘서태지(SeoTaiji)’인지 알아?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스 칠 때 X japan에서 베이스 치는 타이지(Taiji)를 보고 ‘나는 서쪽의 타이지가 되겠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래.”(나중에 서태지는 청나라 권력자였던 서태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밝혔다.)

그때는 일본 대중문화가 아직 완전히 개방되기 전이었다. 나 역시 일본 음악에 대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게 상처를 줬던 일본의 음악이라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가 건넨 CD 플레이어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전혀 다른 세계로 끌려들어갔다.

충격이었다. 빠르고 강렬한 메탈 사운드 속에 장엄한 클래식 멜로디가 살아 있었다. 발라드는 애틋하게 마음을 울렸다. X-japan을 시작으로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비주얼 록에 빠져들었다. ‘LUNA SEA’는 강렬하면서도 몽환적인 멜로디, ‘GLAY’는 팝적인 감각, ‘L’Arc en Ciel’은 달달하고 세련된 곡들로 매력을 발산했다. 이들 음악에는 일본 특유의 멜로디와 정서가 녹아 있었고, ‘J-Rock’이라는 장르로 구별될 수 있는 개성이 있었다.

당시 일본 음악 CD는 일반 음반 매장에서 구할 수 없었고 수입반은 학생이 사기에 너무 비쌌다. 어쩔 수 없이 불법 복제 CD를 구해 친구들과 같이 들었다. 음질이 나빴지만 함께 나눠 들으며 우리는 음악으로 연결된 작은 공동체가 되었다. 그렇게 정서적으로는 가장 멀게 느껴졌던 나라가, 음악을 통해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다가온 것이다.

이것은 나 같은 록 마니아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당시 대한민국 음원 차트를 휩쓸었던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이 X-japan의 ‘Endless Rain’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그들의 곡 ‘Tears’를 번안한 MC the Max의 ‘잠시만 안녕’이 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애니메이션이, ‘러브레터’ 같은 영화가,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인기 작가들의 소설이 일본과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반일 감정을 이용한 정치적 선동에 쉽게 휩쓸리지 않았다. 그런 선동은 일본인을 ‘나쁜 사람’이라는 단순한 전제로 규정하지만,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고 즐기는 이들을 그렇게 하나로 묶어 나쁘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예술에 진심이고 또 잘하는 이들을 가까이하고 싶은 거. 그에 더해 문화예술이 발달한 사회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2019년 봄 그런 믿음을 확신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강원도에 산불이 나 큰 피해가 발생했을 때 X-japan의 리더 요시키가 구호금으로 1억을 기부했던 것이다. 그를 통해 일본인도 예술을 사랑하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며 내 것도 기꺼이 나누는, 국적을 초월한 ‘보통의 인간’임을 다시금 느꼈다.

반일 선동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제 불매 운동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록음악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유명한 일제 악기들 없이는 세계 음악 시장이 움직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을 향한 일본인들의 열정은 세계 유수의 악기 업체들을 탄생시켰다. 기타 제조사인 IBANEZ와 ESP, 드럼은 PEARL과 TAMA, 키보드는 ROLAND과 KORG, 그리고 이 모든 악기들을 생산하는 YAMAHA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세계 정상급 브랜드들이 모두 일본산이다. 이러니 반일 불매 운동을 이끌던 시위대의 밴드가 연주하는 악기 대부분이 일제인 것이 밝혀지자 급히 검정 테이프로 로고를 가리고 공연을 진행했다가 조롱거리가 됐던 것 아니겠나.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인간을 갈라치기하는 것에 더 이상 이용당해선 안 된다. 문화예술을 존중하고 발달시킨 국가들과의 교류가 많아질수록 갈등은 치유되고,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요즘 문제 되는 국가 간 무역 갈등 없이 서로 윈윈 하며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찬란한 문화예술을 꽃피우다 중국에 반환되고 시들어버린 홍콩을 떠올려보자. 왜 우리가 문화예술 강국인 선진국들과 결속력을 강화해야 하는지 그 답이 보이지 않는가.

혼란한 정국 속에서 또 한 번 나라가 가야 할 방향을 묻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문득 광주광역시에서 어릴 적 알고 지낸 친구들이 떠오른다. 그 조그만 방에서 해적판 CD를 돌려 들으며 함께 울고 웃던 그 시절. 음질은 좋지 않았지만, 흐릿한 기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 추억이었다. 그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때 기억나? X JAPAN 들으며 기타 치던 우리, 참 즐거웠지. 앞으로도 네가 좋은 예술 작품을 즐기며 행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09/WGR67AHRPBG5HGJQRBRG57VYV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