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의 시니어하우스 일기] [2] 너나없이 주름투성이 알몸들… 마음이 편해졌다
윤명숙 작가·화가
입력 2025.05.26. 23:55
2023년 마지막 날, 나는 시니어 하우스로 이사를 했다. 85세 이상은 입주 불가라는 연령 제한 때문에 몇 달만 늦었어도 못 들어갈 뻔했다는 이야기는 지난번에 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고 보니 그동안 알뜰살뜰해오던 살림살이가 별안간 정나미가 떨어졌다. 나 혼자 밥 먹자고 쌀을 씻고 싶겠나? 하루 세 끼 식사를 해결해 준다는 달콤한 옵션에 나는 두말 않고 계약했다. 그러고 나니 주방에서 쓰던 그릇이며 냄비가 필요 없게 됐다. 외출할 일도 드물어지니 몇 십 년 동안 장롱 속에 걸려있던 정장들도 천덕꾸러기가 됐다.
그런데도 화구는 굳이 끌고 왔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남아도는 시간만이 문제가 될 새 공간에서 할 일 없는 늙은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림이라도 다시 그려야 할 것 같았다. 침실 옆에 붙은 작은 방에 책장과 책상을 들여놓고 그 옆에 화구들을 펼쳐 놓았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할머니라는 정체성이 내 자존심이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이다.
이곳은 350가구가 기거하는 15층 아파트다. 입주민의 평균 나이는 87세. 1층과 지하 1층에는 아파트 입주민이 공용하는 시설이 빼곡히 들어있다. 이 중 가장 활기 넘치는 곳은 식당으로 하루 세 번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진다. 또 한 곳, 식당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는 곳이 공동 사우나이다.
나는 집에서 샤워를 하지 않고 지하 사우나를 이용한다. 그곳에서 너나없이 마르고 주름투성이인 알몸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편해진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측은지심이 일고, 아무 등에나 무턱대고 비누칠을 해줘도 이상하지가 않다.
유난히 샤워장이 한산했던 어느 날 아침, 평소대로 나는 샤워 꼭지 아래 머리를 디밀고 더운 물로 몸을 적셨다. 샴푸를 하고 눈에 들어간 비눗물을 씻고 고개를 드니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 때를 미는 여자가 나를 향해 팔을 내저으며 소리치는 것이 보였다. 보청기를 뺀 내 귀에 그의 말이 들릴 리 만무. 하는 수 없이 물을 잠그고 주춤거리며 다가가서 말했다.
“보청기를 뺐더니 안 들려요.”
그런 내게 다짜고짜 소리를 버럭 지르는 그녀.
“머리 감을 때는 수돗물을 잠가요!”
나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말인즉슨, 내가 물을 함부로 쓴다는 거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망신스러운 상황을 누가 목격하고 있나? 탕 속에 동그마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가 급히 시선을 피했다. 아군이 될 가망이 없어 보였다. 뒤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의 뒤로 ‘물을 아껴 씁시다’라는 큼지막한 벽보가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졸지에 물을 펑펑 쓰는 몰지각한 할망구가 돼버리다니…. 어떻게든 한 방 되돌려주고 싶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가 폈다.
“에구 죄송해요. 그렇게 할게요!”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그녀가 나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요럴 줄은 몰랐을 걸!’ 내가 그녀의 호통에 대거리를 했다면 옳거니 쾌재를 부르며 그녀는 내게 일장 연설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호기를 선사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얼마나 심심하면 신참내기 기선 제압으로 남아도는 시간을 때우려 할까.
젊어서는 남하고 싸움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인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늙은 몸으로, 더구나 벌거벗고, 관객이라곤 꼴랑 한 명 탕에 모셔놓고 내가 누구 좋으라고 쌈질을 하겠나. 그냥 이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이래 놓고는 지인들이 안부차 “그곳이 불편하지는 않냐? 살 만은 하냐?” 물으면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다고 대답하고 만다.
늙어서 그런지 새벽 5시면 그만 눈이 떠진다. 커튼을 젖힌다. 창밖은 어둠에 싸여 있다. 갈아입을 속옷을 주섬주섬 챙겨놓고 사우나가 열릴 때까지 기다린다. TV를 켜려고 리모컨을 찾다가 마음을 바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문을 등진 채 무춤하니 선다.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한 캔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감을 그리다가 지웠던가? 시도하다 말고 덮어버린 물감 층 위로 불그스레한 흔적이 드러난다. 괜히 마음이 울컥한다. 팔레트 위에 딱딱하게 꾸덕해진 물감을 긁어내고 테레빈유를 적신 수건으로 그 위를 말끔히 닦아낸다. 당장이라도 그림을 그릴 듯. 하지만 슬그머니 방을 나와 문을 닫는다.
6시 5분 전. 현관문을 열고 어둑한 복도로 나온다. 나는 지금 샤워를 하러 가는 길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26/ZM4KBMNRT5CJXCGDUOLK45KEUA/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