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게으른 독일인'

류진창2 2025. 6. 5. 23:49

김홍수 논설위원
입력 2025.06.01. 20:42 업데이트 2025.06.01. 23:56

일러스트=이철원


10여 년 전 그리스·이탈리아·포르투갈 등 남유럽 국가들이 재정 위기를 겪을 때, 독일 언론들은 모욕적 보도를 많이 했다. 시사 잡지 슈피겔은 춤추며 노는 그리스인 삽화를 표지에 싣고 ‘게으른 그리스인’이란 제목을 달았다. 포쿠스지(誌)는 그리스 문화의 상징인 밀로의 비너스상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는 조롱 사진과 함께 ‘유로화 가족 중 사기꾼’이라고 쏘아 붙였다. 당시 독일인 사이에선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포르투갈인이 술집에 들어가 술을 시킨다. 계산은 누가 할까? 독일인이 한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유럽에서 독일인은 근면·성실 그 자체란 평판을 누려왔다. 그 배경엔 역사적·철학적 뿌리가 있다. 500년 전 마르틴 루터 신부가 종교 개혁을 통해 독일 국민에게 “열심히 일하면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독일 철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 정신의 핵심은 근면·성실”이라고 설파했다. 19세기 말 독일인은 하루 평균 14~16시간씩 일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됐지만, 근면한 국민이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1950~60년대 독일은 연평균 8%씩 초고속 성장하며 유럽의 경제 대국으로 거듭났다. 독일 정부는 1964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3000만달러 차관을 주며 경제개발의 종잣돈을 제공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독일 모델을 기반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1990년 동·서독 통일에 따른 천문학적 재정 부담까지 극복하고 유럽 제1의 경제 대국 지위를 유지해 온 독일 경제가 요즘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패권 다툼은 러시아 천연가스, 중국 수출에 크게 의존해 온 독일 경제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2023년(-0.3%)과 2024년(-0.2%)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늪에 빠지자 독일에서 ‘우리가 게을러졌나’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졌다.

▶독일인들의 근로시간은 주당 평균 35시간 정도로, OECD 국가 중 가장 적다. 2023년 기준 연 1341시간으로, 미국(1811시간)보다 470시간 덜 일한다. 노조의 힘이 세 주 4일 근무제가 확산한 데다,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미니잡’이란 단시간 일자리를 늘려왔기 때문이다. 급기야 메르츠 총리가 “마이너스 성장을 극복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면서 법정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8시간’에서 ‘주당 48시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여론은 찬반으로 갈려 있다. 조만간 그리스 언론이 ‘게으른 독일인’ 특집 기사를 낼지도 모르겠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6/01/666X67CVABEL3AW2W56H4JJA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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