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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아무튼, 주말] 이웃이 버린 책장·서랍 쓰고 있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미안하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24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내 나이에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자주 있다. 지난봄에는 경북 문경에서 지내던 목회자가 일터를 제주도로 옮겼다면서 찾아왔다. 미국 이민 2세였는데 우연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고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자각심이 들어 일터를 한국으로 정했다고 했다. 낡아 떨어지게 된 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와 큰절을 하고 간 일이 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구름 사진 작가인 김종호씨가 구름 사진 작품 5점을 차에 실어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책으로 된 사진첩은 먼저 받아보았고 그중에서 내가 고른 사진들을 다시 대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중 3점은 강원 양구의 기념관으로 보냈다.

집에 들어선 그가 초라하게 텅 비어 있는 거실과 2층 서재를 보고 하는 첫마디가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하십니다"라는 인사였다. 그랬을 것이다. 살 줄도 모르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가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서재에 있는 책상과 그 옆에 있는 서랍 달린 장은 가까이 살던 사람이 이사 가면서 버린 것을 도우미 아주머니가 밤중에 날라 온 중고품이다. 옆방에 있는 4층짜리 책장도 어디선가 주워 온 것이다. 하도 물건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내가 없을 때 옮겨오곤 했다. 고맙기는 한데 누가 보았겠다고 하면 "제가 그런 실수야 하겠어요?" 하면서 창피할 것도 없다는 자세였다.

침대가 있는 방의 걸상은 6·25전쟁 후에 처남이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준 것이다. 벌써 60년이나 지난 골동품이다. 지금 수고해 주는 도우미는 그런 과거를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누군가가 이사 가면서 대문 앞에 내놓은 것이라면서 또 옮겨왔다. 이렇게 무겁고 큰 서랍장을 어떻게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세 차례나 들어 날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20여 년 내 서재에서 책상으로 쓴 널판은 양구로 보냈는데 어울리는 곳이 없어 복도에 밀려나 있었다. 마치 나에게 "아저씨 나는 어디로 가지요? 다시 서울로 가면 안 되나요?" 하고 묻는 듯싶었다. 20여 년 동안 정들었는데.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좋은 책상과 가구는 장만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생활용품 때문에 생기는 관심과 시간 낭비를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물건 정돈이나 청소는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재정적 여유가 생기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관도 이해해야 한다. 돈은 돌아야 제구실을 한다. 나같이 한 양복을 30년씩 입거나 구두 한 켤레로 2년을 보낸다면 양복점 사람이나 신발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하다. 많이 받으면서 적게 주는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6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