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10원짜리의 추억

한현우 논설위원

입력 2019.07.04 03:12


버리기도 모으기도 어정쩡한 천덕꾸러기 '10원' 동전… 수십 년 추억이 담겨 있어
아버지 흰머리 한 올에 10원, 내 기억 속 최초 버스 요금 15원…


이사 준비를 하다가 서랍 속에서 10원짜리 동전만 모아둔 통을 발견했다. 몇 년간 모았으니 양은 꽤 많지만 세어봐야 1000원쯤일 것이다. 이제 10원짜리를 쓸 일이 거의 없어 처치 곤란이다. 가게에서 20원에 파는 봉투를 살 수는 있겠지만 그러려고 동전을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지는 않다. 그냥 버릴까도 생각했으나 그 역시 못 할 일이다. 냉장고 정리하며 상한 과일이나 채소 몇 천원어치는 버려도 10원짜리 동전은 버릴 수 없다. 그 얼굴에 '십원'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를 몸에 새기고 있는 놈을 어떻게 쓰레기통에 버린단 말인가. 신형 10원 주화는 이제 자판기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설령 들어간다 해도 커피 한 잔을 빼먹느라 동전 30개를 넣는 모습도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출근할 때 들고 나가 회사 근처 은행에서 입금하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묵직한 동전 꾸러미를 주머니에 넣고 출근하는 것도 그렇지만, 10원짜리 동전을 입금하다가 회사 동료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상사를 마주치는 것과 후배를 만나는 경우 중 어느 쪽이 더 민망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서랍을 닫아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버스 요금은 15원이었다. 일고여덟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그때 동네 형들이 반포인가 잠원동에 메뚜기 잡으러(!) 가자고 했다. 버스비는 형들이 대신 내줬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이었다. 논에 들어가 놀다가 어떤 형 다리에 거머리가 붙었는데 막대기로도 돌멩이로도 안 떨어지는 찰거머리였다. 그 형은 "나 죽으면 어떡해!" 하고 엉엉 울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왜 너는 전화도 문자도 안 받니라고 묻지 않고―하마터면 경찰서에 신고할 뻔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첫 질문은 "버스비는 어디서 났느냐"는 것이었으며 형들이 내줬다고 하니까 당장 가서 돌려주라며 왕복 버스 요금 30원을 주셨다. 그때 30원은 수십 년짜리 추억을 만들기에 충분한 돈이었다.


아버지 머리가 처음 세기 시작했을 때 흰 머리카락을 잘 솎아내 뽑아드리면 아버지는 한 올에 10원씩 주셨다. 실수로 검은 머리를 뽑으면 도로 토해내야 했다. 10원짜리 칼로 연필을 깎아 쓰던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어머니께 "20원짜리 칼로 연필을 깎으면 공부가 잘된다더라"고 용기 있게 말했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20원을 주셨다. 나도 고1짜리 딸이 "노트북을 맥북에어로 바꿔주면 숙제를 잘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아무 말 없이 그 반짝이는 컴퓨터를 사줬다. 돈은 20원보다 훨씬 많이 들었다.

2006년부터 발행된 신형 10원 주화는 구리 함량이 이전보다 적어 작고 가볍다. 새 10원짜리가 나온 이유 중 하나는 10원 주화를 용광로에서 녹인 뒤 동파이프로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구형 10원 주화 5억원어치를 녹여 팔아 7억원을 남겨 먹은 일당이 잡힌 적 있다. 당시 10원짜리 1개에서 나온 구리의 가치는 34원이었다고 경찰은 말했다. 이들이 잡힌 데는 "어떤 사람이 신형 10원짜리를 입금하고 구형 10원짜리로만 출금해 갔다"는 은행원의 제보가 결정적이었다. 미국에 출장 갔다가 10대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1센트짜리 동전을 손가락으로 튕겨 멀리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1센트면 얼추 10원이니 그 나라 사정도 비슷한 모양이다. 그래도 아직 미국은 현금을 선호하는 가게가 많고 부가세가 붙으면 물건값 끝이 센트 단위일 때가 잦아 금세 1센트짜리 동전이 모인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요령껏 쓰고 팁 넣는 함에 다 붓는 게 해결 방법이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꼭대기 전망대에 가면 1센트짜리 동전을 짓이겨 길게 늘인 뒤 빌딩 모양을 새긴 기념품으로 만들어 토해내는 기계도 있다. 영국의 10원이라고 할 페니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처럼 페니 단위 거스름돈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고 한다. 쓸 일도 많지 않고 제작 비용 높 은 페니를 없애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여론조사에서는 절반 이상이 "페니는 영국 역사의 일부"라며 폐지를 반대했다는 뉴스가 얼마 전 신문에 실렸다.

아무래도 10원 꾸러미를 챙겨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청계천 어디에 동전 던지는 곳이 있어 거기 모인 돈으로 장학금을 준다고 하니, 어느 주말 청계천에 가서 조용히 꾸러미를 풀어야겠다. 아, 누가 보면 어쩌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3/20190703033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