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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6시 땡! 칼퇴? 연구실 김팀장은 한숨이 나온다

채성진 기자  최인준 기자  곽래건 기자

입력 2018.10.02 03:07


[52시간 시행 석달]
법은 지키라하고, 결과물도 내놓으라 하고어쩌란 말이냐


"주 52 시간은 지켜야 하고, 아웃풋(결과물)은 똑같이 내야 하니 집이나 카페서 야근하든지 알아서 맞추라는 것이다. 사실상 편법을 방관하는 분위기다."

지난 7월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에 대해 B바이오사 임원은 "회사 대표가 잡혀갈 수도 있는 문제인데, 회사가 대놓고 이래라저래라 말도 못한다"면서 푸념했다. 그는 "연구원들은 오전에 동물에 주입한 약물을 저녁에 확인하고 기록해야 하는데 52시간 맞추라고 비는 오후 시간에 영화관서 놀다 오라고 할 수도 없지 않으냐"고 했다. 주 52 시간 근무제 시행에 들어간 한 대형 은행은 오후 6시면 PC가 자동으로 꺼지도록 했다. 야근이 불가피한 경우 상급자 허락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이 은행 인사팀은 연말 인사철을 앞두고 업무량이 많아지자 언젠가부터 6시가 되어도 PC가 꺼지지 않는다. 이 은행의 대리는 "52시간을 지키라는 건지, 알아서 야근하라는 건지 서로 눈치만 본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석 달이 지났다. 일부 대기업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 불필요한 야근과 회식이 줄면서 52시간이 정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기업 경쟁력 악화 등 우려했던 부작용이 현실화하고 있다.

◇"연구 질이 떨어질 수밖에"

신약 후보 물질을 동물에게 실험하는 경우 연속 투여가 중요하다. 밤이고 주말이고 쉴 틈이 없다. 연구원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보니 52시간을 맞추기 위한 근무시간 조정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제약회사 연구전략기획팀장은 "아침마다 '연구원들 52시간을 어떻게 맞추지'라고 고민하는 게 일이다"며 "나라 전체로 보면 정말 심각한 부작용이다"고 말했다. 다른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부장은 "정부가 R&D를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면서도 주 52시간을 지키라니 황당하다"며 "선진국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제 막 신약 개발 시동을 거는 우리는 기초 실력 올리는 데도 절대적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국내 완성차 업체는 오후 6시면 PC가 자동으로 꺼진다. 사실상 강제 퇴근 조치다. 이모 연구원은 "바쁠 때는 주말에도 나와 연구해야 하는데 일과 시간이 끝나면 컴퓨터가 꺼지고, 주말에도 컴퓨터를 못 쓰니 결국 연구 질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연구원을 늘린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야 (52시간을) 지키려 노력하지만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정유사 한 임원은 "요즘은 직급이 높은 순서대로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며 "(52시간 적용을 받지 않는) 임원들만 거래처 술이나 골프 접대에 동원되다 보니 '52시간=임원 학대법'이라는 넋두리도 나온다"고 했다.

◇집중 근무로 효율성 높아지는 효과도

지난달 19일 경기도 의왕에 있는 현대위아 본사 16층 사무실. 오후 5시가 되자 10대의 TV에서 일제히 가수 선미의 신곡 사이렌(Siren)의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직원 컴퓨터 모니터엔 '5분 뒤 PC가 종료됩니다'라는 안내문이 팝업(Pop-up)으로 떴다. 5시 5분이 되자 컴퓨터는 자동으로 꺼졌다. 직원들은 하나둘씩 가방을 챙겨 퇴근하기 시작했다. 원래 퇴근 시간이 5시였지만 서로 눈치 보면서 6시를 넘겨 일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7월부터 'PC 오프제'를 시행하면서 정시 퇴근이 가능해졌다. 퇴근 버스도 오후 6시 15분에서 5시 20분으로 당겨졌다.

9월 첫째 주 갑작스러운 업무 지시로 주말 야근까지 해야 했던 대기업 전자계열사 부장은 그다음 주 주중에 강제퇴근 명령을 받았다. 그는 "오전 업무만 끝내고 퇴근해 개인 시간을 보냈다"며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지만 52시간 근무가 정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지난달 20일 오후 2시 이마트 서울 성수동 본점 스피커에서 "지금부터는 집중 근무 시간입니다. 정시 퇴근을 위해 회의·흡연·티타임 등 업무에 방해되는 행동을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집중 근무'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다. 외부 협력 업체 직원과 업무 협의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 2시간 동안 20층 건물에선 내부 임직원 회의가 일절 없었다. 휴식 공간에서 담소를 나누는 장면도 볼 수 없었다.

이모 부장은 "요즘은 업무 강도가 높아져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오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며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이 줄면서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회식 줄고, 개인 시간 늘어

전남 나주에 있는 한국전력에 다니는 배모 차장은 저녁 6~7시쯤 퇴근해 5세 아이와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 단지 내 수영장도 자주 간다. 주 52시간 시행 이전 8시가 넘어 퇴근하던 때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52시간 실시 이후 한전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오는 아빠는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무역보험공사에서 회식은 거의 사라졌다. 회식을 하려면 한 달 전에 미리 공지를 해야 한다. 불가피 하게 회식을 하더라도 9시 이전에 끝내도록 권장하고 있다.

정유 업체 에쓰오일의 한 간부는 "회식하자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분위기"라며 "퇴근 시간이 1~2시간 빨라지니 운동이나 독서 등 여가 즐기는 직원도 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정유사의 팀장은 "근무시간이 빡빡해지고 자기 업무에만 집중하다 보니 사무실 분위기는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출처: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01/20181001033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