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18.09.11 03:14
싹 틔우고도 뿌리에 남는 밤알… 근본 잊지 않는다고 차례상 올려
곰팡이에 사라진 미국밤나무 숲… 유전자 연구로 복원할 길 열려
밀에서 찾아낸 독성 차단 유전자로 곰팡이병 끄떡없는 신품종 만들어
추석이 다가왔다. 차례상을 준비할 때마다 옛 어른들의 손이 그리워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밤 깎기이다. 밤 깎기 전용 칼도 있지만 판매원이 시범을 보이는 만큼 능숙하게 껍질을 깎아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가을이라 다른 열매도 많은데 왜 굳이 힘들여 밤을 깎아 차례상에 올릴까. 어른들은 갓 싹을 틔운 밤나무 묘목을 찾아 땅을 파보라고 하신다. 신기하게도 밤나무는 뿌리와 줄기의 경계 지점에 알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른 과일은 사람들이 먹는 과육 안에 씨가 있지만 밤은 우리가 먹는 밤이 바로 씨앗이다. 대부분 씨앗은 싹이 돋아나면서 겉껍질이 썩어 없어지지만 밤은 위아래로 줄기와 뿌리를 보내고도 형태를 유지한다. 옛사람들은 이를 보고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상에 대한 고마움과 뿌리 의식을 잊지 않기 위해 밤을 제사상에 올렸다. 사당에 모시는 신주(神主)도 꼭 밤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미국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밤나무를 연구하고 있다. 뉴욕주립대 연구진은 올가을 정부에 새로 개발한 밤나무를 기존 밤나무와 교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신청할 계획이다. 연구의 목적은 20세기 들어 인간의 실수로 사라져버린 조상의 밤나무 숲을 되살리는 것이다. 새로 개발한 밤나무는 20세기 초 미국밤나무를 초토화시킨 밤나무줄기마름병 곰팡이에 저항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과거 미국 동부는 밤나무 천지였다. 약 40억그루의 밤나무가 꽃을 피우는 6월이 되면 숲이 온통 눈에 덮인 듯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곰이나 다람쥐·칠면조는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과 신대륙을 찾아온 유럽 이주민들까지 밤을 즐겨 먹었다. 우리가 닭 몸통 안에 대추와 밤을 넣어 삼계탕을 끓이듯 초창기 이주민들도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속을 밤으로 채웠다고 한다. 19세기 미국의 자연주의 사상가 데이비드 소로도 저서 '월든'에서 동부의 마을마다 끝없이 펼쳐진 밤나무 숲에서 놀던 시절을 얘기했다.
재앙은 1904년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서부터 시작됐다. 갑자기 밤나무들이 줄기가 썩어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시아에서 수입한 밤나무에 묻어온 곰팡이가 원흉이었다. 곰팡이에 감염되면 줄기를 따라 둘레가 둥글게 썩었다. 이러면 물과 영양분이 위로 가지 못해 결국 나무가 죽는다. 뿌리는 멀쩡해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기도 하지만 과거처럼 30m의 거목(巨木)으로는 자라지 못했다. 1950년에 이르자 동부 지역 산림에서 뉴욕주 면적의 숲이 사라졌다고 한다.
미국 과학자들은 1983년 비영리 연구 단체인 미국밤재단을 설립해 곰팡이병을 이겨낼 다양한 방법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기술이 역교배(逆交配)이다. 곰팡이에 강한 아시아밤나무와 남아 있는 미국밤나무를 교배한 다음 잡종 1대를 다시 선대(先代) 미국밤나무와 교배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6대(代)를 역교배하면 아시아밤나무의 특성은 사라지고 곰팡이 저항성을 가진 미국밤나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0여 대학 연구진이 재단의 연구에 참여했다.
뉴욕주립대 윌리엄 파월 교수 연구진은 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곰팡이 저항 유전자를 미국밤나무에 도입하는 것이다. 밤나무줄기마름병은 곰팡이가 분비하는 옥살산이 원인이다. 연구진은 다양한 식물에서 옥살산을 억제하는 유전자를 탐색했다. 그 결과 빵을 만드는 밀에서 강력한 옥살산염 산화 효소를 발견했다. 이 유전자를 밤나무 유전자에 집어넣자 곰팡이에 감염돼도 끄떡없었다.
다음은 이 밤나무를 미국의 숲에 퍼뜨리는 일이다. 연구진은 농무부(USDA)와 식품의약국(FDA), 환경보호국(EPA)이라는 미국 정부에서 가장 까다로운 세 군데 규제 기관을 통과해야 한다. 농무부는 유전자가 새로 도입된 밤나무가 다른 식물에 해가 되지 않는지 조사를 하며, FDA는 밤나무에서 수확한 밤이 식용으로 안전한지 따진다. EPA는 밤나무줄기마름병을 차단한 효소를 살균제로 규제할지 고민 중이다.
연구진은
낙관적이다. 밤나무는 유전자가 4만 개쯤 된다. 기존의 잡종 교배로 신품종을 만들면 유전자가 2만 개 이상 달라지지만 새 방식은 곰팡이 저항 유전자 단 하나만 바뀐다는 것이다. 밤나무는 물론 주변 식물과 벌, 인근 연못의 올챙이까지 아무런 해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부디 조상의 숲을 되살리려는 미국 과학자들에게 올 추석 좋은 소식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데이비드 소로, '월든', 월리엄 파월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0/20180910033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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