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 문화2부장
입력 2018.03.01 03:14
올해 작곡가 이영훈 10주기 맞아 이문세·한영애 등 추모 콘서트서 '휘파람' '옛사랑' 등 名曲 불러
"노래 안에 자기 언어·세계 있어"
생각과 표현 다른 사람이 예술… 가그런 창작물이 오래 사랑받아
10년 전인 2008년 1월 18일, 말기 암 투병 중이던 작곡가 이영훈의 병실에 찾아갔다. 혼자 가기 머쓱해서 그의 음악 동지인 이문세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이문세는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침상 옆에 무릎 꿇더니 이영훈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사진기자가 그 장면을 찍었고 며칠 뒤 두 사람 사연이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다. 훗날 "이문세가 기자를 데리고 가서 쇼를 했다" "사진을 억지로 찍었다"고 말을 만들어낸 자들이 있었다.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문세에게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은 나였고, 사진은 기도 이후에도 계속 찍었다. 그날 이영훈이 이문세에게 말했다. "문세씨, 우리가 만든 발라드가 후세에 남을 수 있게 해줘요. 우리가 젊었을 때 몸 바쳐서 만든 거잖아." 그로부터 한 달 못 된 그해 2월 14일 새벽, 이영훈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이문세는 이영훈과 한 약속을 지켰는가. 이영훈 10주기를 맞아 지난 2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작곡가 이영훈 콘서트'는 그 약속이 굳게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무대였다. 이문세를 비롯해 한영애 윤도현 박정현 김범수 같은 가수들이 이영훈 노래를 한두 곡씩 부르러 나왔다. 객석은 남녀노소로 가득 메워졌다. 어느 대중음악 작곡가가 떠난 지 10년 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 대부분 이문세를 통해 알려진 이영훈의 노래들은 이날 다른 가수들의 목소리로 변주되면서 그 가사가 새롭게 돋보였다. 작곡가 이영훈은 클래식 작법을 차용해 한국에 '팝 발라드'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이지만, 작사가 이영훈은 계절과 자연에 사랑을 담아 노래한 이였다.
이영훈, 이문세, 한영애, 윤도현, 박정현, 김범수
"그대 떠난 여기/ 노을진 산마루턱엔/ 아직도 그대 향기가 남아서/ 이렇게 서 있소" 하고 이영훈은 '휘파람'에서 노래했다. 발걸음 떼지지 않는 길을 떠나는 이는 산마루턱에서 이별을 고했다. 굽이굽이 산길 멀리 그의 그림자조차 사라졌을 때, 노래 부른 이는 아직도 그의 향기를 맡고 노래한다.
"그대여/ 나의 장미여/ 그대는/ 휘파람 휘이히/ 불며 떠나가 버렸네." 물론 휘파람 소리는 노래하는 이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다.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이 '옛사랑'을 연주할 때 가사가 스크린에 비쳤다.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며 울었지"로 시작하는 그 노래다. 그 멜로디에 저 가사가 아니라면 대체 어떤 노랫말을 붙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사는 "광화문 거리/ 흰 눈에 덮여가고/ 하얀 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로 이어진다. 거리엔 눈이 쌓이는데 왜 이영훈은 눈이 자꾸 하늘로 올라간다고 했을까. 옛사랑과 나눈 시간을 되돌려보려는 마음이었나. 그는 고백한다.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고. 지겨울 만큼 사랑했기에 헤어졌다. 그러고는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라고.
기타리스트 엄인호는 이날 영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곡가가 가사를 직접 쓰니까 곡에 딱 맞아떨어져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야, 연애깨나 했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작곡가 구자형은 말했다. "노래 안에 자기 언어가 있고 자기 세계가 있던 사람이에요."
전제덕, 엄인호, 구자형, 이병헌
이날 배우 이병헌이 깜짝 출연해 덜 알려진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를 불렀다. 이영훈의 팬이어서 선뜻 섭외에 응했고 한 달간 노래 연습을 했다고 한다. 대단히 부르기 어려운 노래인데도 그는 꽤 연습한 듯 잘 소화했다(이병헌 목소리는 상당한 미성이었다). "내가 갑자기/ 가슴이 아픈 건/ 그대 내 생각/ 하고 계신 거죠/ 흐리던 하늘이/ 비라도 내리는 날/ 지나간 시간 거슬러/ 차라리 오세요" 하는 가사를 듣다가, 이영훈 노래에 눈과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린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예술은 습하고 추운 곳에서 더 맹렬히 타오르는 법이다. 이문세는 마지막에 등장해 단 두 곡을 부르고 무대를 내려갔다. 마지막 곡 '그녀의 웃음소리뿐' 가사가 깊이 박혀들었다. "이대
로/ 떠나야만 하는가/ 너는 무슨 말을 했던가."
영상 인터뷰에 등장한 이영훈의 친구가 말했다. "(가사를 보면) 영훈이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랑 다른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예술가는 그런 사람이다. 생각이 다르고 표현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 그런 예술가의 창작물이 오래도록 후세에 전해진다. 예술과 공산품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법이기도 하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8/20180228026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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