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Why] 13년 동안 재판 1건… 집단소송, 한국에선 왜 이리 힘드나

이정구 기자

입력 2018.01.06 03:02


애플 '배터리 게이트'로 수십만명 집단소송 추진현실은



일부 구형 아이폰 성능을 사용자 몰래 낮춘 '배터리 게이트'가 들통나자 애플은 배터리 교체 비용을 할인해준다는 당근을 내놓았다. 국내에서도 애플코리아가 지난 2일부터 10만원이었던 배터리 교체 비용을 6만6000원 내려 3만4000원에 새 배터리로 바꿔주고 있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AS센터 대신 로펌을 찾고 있다. 애플의 당근을 받는 대신 법정 싸움을 벌여보려는 사용자가 국내에서만 수십만 명에 달하고 있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골리앗 애플과 법정 싸움을 벌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싶겠지만 지난달 28일부터 피해자를 모으기 시작한 법무법인 한누리에만 일주일 새 32만명(4일 오전 10시 기준) 넘는 사람이 소송 참여 의사를 밝혔다. 성공 보수는 따로 받지만 우선 소송 착수금으로 단돈 1만9900원만 받고 소송을 진행하겠다는 로펌과 피해자 100명을 모아 공익소송을 진행한다는 소비자단체도 나왔다. 법무법인 한누리 조계창 변호사는 "애플이 제시한 보상안에 따라 AS센터에서 배터리를 교체했더라도 소송에 참여할 수 있다"며 "오는 11일 이후부터 위임을 받아 실제 소송인단을 꾸리면 인원이 줄겠지만, 현재까지 반응을 고려하면 최소 수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소송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은 2명이 집단소송, 국내 로펌은 왜 수만 명 모집하나

몇 주에 걸쳐 대규모 소송 참가자를 모집하는 국내와 달리 미국에서는 지난달 19일 애플이 배터리 게이트를 시인하자 곧바로 애플 상대 소송이 시작됐다.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 연방지법 각각에 아이폰 사용자 2명이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시카고 연방지법에도 5명이 고소장을 접수하면서 미국 각지에서 집단소송이 이미 시작됐다. 미국에 있는 아이폰 사용자들이 애플을 상대로 빠르게 소송을 시작할 수 있던 것은 집단소송(Class Action) 제도 덕분이다. 미국의 집단소송은 전체 피해자 중 일부가 승소하면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배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를 모집해 소송을 진행할 필요가 없다. 아이폰 배터리 게이트처럼 동시에 여러 집단소송이 제기된 경우에는 처음 집단소송 허가를 받는 법원에 나머지 재판이 병합돼 하나로 진행된다.

금융기관·온라인 쇼핑몰 개인 정보 유출처럼 피해자가 수백만 명 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국내에서도 집단소송이라는 표현을 흔히 쓰지만, 엄밀히 따지면 집단소송은 아니다. 민사소송법상 다수 당사자 소송 중 하나로, 원고의 숫자에만 차이가 있을 뿐 보통의 민사소송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공동소송에 해당한다. 미국의 집단소송과 다르게 피해자 중 일부가 승소했더라도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는 승소 판결에 따른 법적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국내에서는 민사소송법 특례로 2005년부터 시행된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을 통해 증권 분야에만 제한적으로 미국과 비슷한 집단소송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아이폰 같은 일반소비재는 대상이 아니다.

개인 정보 유출 등 다수 피해자가 발생한 경우 로펌이 나서 피해자를 대규모로 모집해 공동소송을 진행하는 방식이 흔한데, 이에 대한 우려 목소리도 있다. 변호사 출신 장진영 국민의당 최고위원은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운 재판에서 무작정 대규모로 사람을 모아 소송을 진행하면 '수임료로 변호사 배불리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며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은 마라톤과 마찬가지인데 소수 인원으로 먼저 분쟁을 다퉈보고 결과에 따라 원고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 최고위원은 2006년 LG카드(현 신한카드)가 공지 없이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 혜택을 일방적으로 축소하자 당시 사법연수생 신분으로 홀로 소송을 제기해 국내 대형 로펌을 상대로 승소한 다음 같은 피해를 본 사람들을 모집해 배상을 받아낸 바 있다.

결국 개인도 싸워야 하는 국내 집단소송

이번 배터리 게이트 사건을 국내 소송으로 진행하지 않고 미국 현지 로펌이 진행하는 집단소송에 참여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김연호국제법률사무소의 김연호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 북부 연방법원에서 진행 중인 집단소송에 참여하기 위해 현지 로펌과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변호사는 미국의 다우코닝이 제조한 가슴 확대용 실리콘 부작용 사건에서 한국 피해자의 미국 법원 집단소송을 맡아 2011년 한국인 피해자 660명 앞으로 총 390만달러(약 43억5000만원)의 배상을 받아낸 경험이 있다. 배출가스 조작으로 연비를 속인 폴크스바겐·아우디는 미국 법원에서 진행된 집단소송에서 이미 철퇴를 맞았다. 약 50만명의 피해자에게 170억달러(약 18조원)의 합의금을 지불해야 하고 미국 정부에 벌금 43억달러(약 4조5000억원)도 내야 한다.

폴크스바겐·아우디의 배출가스 조작 국내 피해자들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바른도 미국 현지 집단소송과 국내 공동소송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미국 테네시주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을 소유한 한국 고객의 소송도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 집단소송에 병합돼 진행 중이다. 하종선 바른 변호사는 "독일에서 생산된 차량을 소유한 의뢰인도 미국 집단소송으로 진행할 수 있는지를 폴크스바겐 측과 다툴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 변호사는 "현재 진행 중인 국내 소송과 미국 집단소송을 비교하면 국내에선 소송인단에 참여한 전원이 각각 피해 입증을 해야 한다"며 "필연적으로 소송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4년 국내 카드사 여러 곳에서 총 1억 건이 넘는 고객 정보가 유출된 이후 제기된 소송에서 카드사의 '컴퓨터 화면 캡처 요구'는 국내 공동소송의 애로 사항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다. 카드사는 정보 유출 여부를 확인하는 온라인 홈페이지 화면을 원고 모두 각각 캡처해 재판부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전국 각 지방법원에서 소송을 대리했던 변호사 19명은 "인터넷을 잘 모르는 장년층을 포함해 20만명에게 피해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라며 컴퓨터 화면 캡처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라는 요구는 소송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며 "카드사의 고의적인 재판 지연 전략"이라고 반발했다. 카드사는 "과거 유출 사건에서 실제 피해가 없었는데도 소송에 참여한 경우가 있어 이를 구분하려는 조치였다"고 답했다.

재판까지 가는 길이 더 힘든 집단소송

이 때문에 집단소송제 도입 목소리는 1990년대 후반부터 계속 나왔지만 법안은 계속 표류했다. 20대 국회에도 집단소송제 관련 법안 8건이 계류 중이다. 지난 국회 때도 17건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됐다.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운영 과제 중 하나로 선정되면서 힘을 얻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살충제 계란 파동 등 사회적으로 소비재 분야 집단 피해가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대표는 "현재 피해자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하면서 각자 재판에서 피해 정도를 입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며 "피해자 권리 구제를 위해선 소비재 분야 집단소송도 필수"라고 말했다. 법무부도 지난해 10월 19일 발표한 '법무행정 쇄신방향'을 통해 현재 증권 분야에만 시행 중인 집단소송제도를 소비자 분야로 확대할 계획을 내비쳤다. 2018년 상반기 중에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을 개정해 적용 범위를 넓힌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현행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과 같은 규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적용 범위를 확대해도 크게 나아지는 게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집단소송인 증권관련 집단소송은 법원의 집단소송 개시 허가를 받아야 본안소송이 진행된다. 해당 사건이 집단소송 대상이 되는지를 법원에서 먼저 판단하는 절차인데, 원고와 피고가 3번까지 다툴 수 있다 보니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2005년 법 시행 이후 13년 동안 실제 재판으로 이어진 사건은 단 한 건이었는데 소송 허가를 받고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6년이 걸렸다. 서희석 한국소비자법학회 회장(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소송 허가 절차는 소(訴)가 남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한 규정이지만 사실상 6심제 재판으로 운영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집단소송을 확대 적용하더라도 6심제 개선이 없다면 당장 피해 구제가 급한 사람들에겐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인 제도"라고 말했다. 강찬호 대표도 " 당장 손해 배상이 급한데 재판을 여섯 번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면 집단소송이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오히려 더 어려운 재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소송 적용 범위를 소비재, 환경, 노동 분야까지 넓히고 법원의 소송 허가 결정 기한을 3개월로 규정한 법안을 지난해 11월 발의했다.

조계창 변호사, 장진영 위원, 김연호 변호사, 하종선 변호사

강찬호 대표, 서희석 교수, 백혜련 의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5/20180105014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