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구 기자
입력 : 2017.11.18 03:01
청소년쉼터 123곳… 퇴소자 중 56%가 적응 못하고 제 발로 나가
거리로 되돌아가는 이유
크게 통제하진 않지만
흡연 제한·통금 시간 등
규칙 못 견디고 퇴소
날 추워지면 돌아오기도
"(가출청소년) 쉼터에 들어가면 담배도 못 피우게 하고 오토바이도 못 타서 답답해요. 밖에 있는 게 편한데 날이 더 추워지면 갈 곳을 찾아봐야죠."
6개월 전쯤 경기 의정부시 집에서 부모님과 다투고 집을 나온 이모(17)군은 거리 생활을 하고 있다. 친구들 집과 찜질방, PC방을 오가면서 밤을 보낸다. 전단 아르바이트와 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마련하지만 이마저도 떨어져서 갈 곳이 없을 땐 가출청소년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청소년쉼터를 찾는다. 이군은 "지금까지 쉼터를 다섯 곳 정도 갔었는데 규칙이 엄격했던 곳은 답답해서 하루도 있지 못했다"며 "쉼터가 마음에 안 들면 가출한 친구들에게 다른 쉼터 정보를 얻어서 간다"고 말했다. 이군처럼 쉼터 여러 곳을 '투어'하듯 맴도는 청소년을 가출청소년들 사이에서 '쉼돌이, 쉼순이'라고 부른다.
서울 신림·동대문·천호 등 가출청소년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거리상담을 하는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김희재 팀장은 "요즘 아이들은 정보 교환이 빨라 '어느 쉼터에는 무서운 선생님(청소년지도사 또는 사회복지사)이 있어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쉼터를 골라 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다"며 "한곳에 안정적으로 머무르길 바라지만 거리에 익숙한 아이들은 쉼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쉼터 왔던 청소년 절반, 다시 거리로
가출청소년 보호 시설인 청소년쉼터는 전국에 123곳 있다. 정부 시범사업으로 1992년 서울 YMCA 청소년쉼터에서 시작됐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가출청소년이 늘면서 광역시 중심으로 쉼터가 늘었다. 청소년쉼터는 보호 기간과 제공하는 복지 서비스에 따라 ▲일시(24시간~7일 이내, 조기 발견과 일시 보호) ▲단기(기본 3개월~최장 9개월, 상담·사회 복귀 프로그램) ▲중장기(3년·1년 단위 연장, 자립 지원)쉼터로 나뉜다.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휴식 시설과 상담 공간을 갖춘 이동식 '찾아가는 쉼터'도 10대 운영 중이다. 청소년기본법에 따라 만 9~24세까지, 지역과 상관없이 원하는 청소년쉼터를 골라서 입소할 수 있다. 2013년 가출청소년 1만5242명이 찾았던 청소년쉼터에 지난해 그 두 배 가까운 3만329명이 찾아 도움을 받았다. 올해 9월 말까지 2만1168명이 이용했다.
청소년쉼터를 찾는 가출청소년이 꾸준히 느는 가운데 그중 절반가량은 스스로 쉼터에서 나와 다시 방치된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3일 박경미 의원(더불어민주당·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이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청소년쉼터 유형별·퇴소사유별 인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청소년쉼터에서 퇴소한 청소년 2만9256명 중 절반이 넘는 55.9%(1만6352명)가 제 발로 쉼터를 나갔다. '가정 및 학교 복귀(31.4%)', '관련 시설 의뢰(8.1%)' 등 쉼터 퇴소 후 진로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는 1만2022건으로 41.4%였다. 박 의원은 "가정 학대와 폭력으로 집을 나와 위기 상황에서 쉼터를 찾는 청소년은 꾸준히 늘고 있는데, 절반 이상이 쉼터를 스스로 나가는 것은 쉼터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각 청소년쉼터마다 정해져 있는 보호 기간이 만료돼 어쩔 수 없이 나가야 하는 경우는 254명(0.9%)에 그친다. 숙식이 해결되고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는 쉼터를 마다하고 거리로 향하는 이유에 대해 가출청소년들과 쉼터에서 같이 생활하는 청소년지도사와 사회복지사들은 "개인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결국 규칙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쉼터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흡연과 통금 관련 규정이 있다. '담배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평일과 일요일은 9시, 토요일은 10시까지 쉼터로 귀가' '취침시간에는 스마트폰 사용 금지' 같은 내부 규칙을 지켜야 한다. 이 같은 몇 가지 규칙 외에는 크게 통제를 하지 않지만 거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족쇄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다. 서울특별시립금천청소년쉼터 박은주 상담팀장은 "단기 쉼터에 입소하겠다고 찾아온 아이들에게 쉼터 규칙을 설명하면 듣자마자 못 있겠다고 나가는 아이들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이성교제도 쉼터 생활에 걸림돌이다. 대부분 쉼터는 남녀 청소년을 구분해 운영한다. 통금 시간도 다르다 보니 다른 쉼터에 있는 이성친구를 만나는 데 불편하기 때문에 차라리 거리를 택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맘에 드는 쉼터 찾아 방방곡곡 헤매기도
서울 시내 한 청소년쉼터 직원들은 한 번씩 경찰 신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신고를 한 사람은 그 쉼터에 머무르고 있던 가출청소년들이다. 쉼터 규칙에 따라 주말에 외출을 제한하면 "복지시설에서 미성년자를 감금하고 있다"며 신고했다고 한다. 이 청소년들은 쉼터에서 나와 다른 곳을 찾아야 하지만 크게 아쉬울 건 없다. 가출청소년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나 단체 카카오톡(카톡)방에 글을 남기면 그만이다. "A쉼터는 규칙이 너무 엄격하고 불편해서 나왔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아니면 도움 주실 분 계신가요?"
가출청소년 80여 명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직접 들어가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살펴봤다. 서로 경험한 쉼터에 대한 정보가 오갔다. "서울에선 신림쉼터에 전통적으로 드센 아이들이 많으니 될 수 있으면 다른 곳을 알아보라" "의정부쉼터는 생활하는 건물이 남녀 따로 있지만 거리가 멀지 않으니 여자친구랑 같이 가출했으면 그곳이 좋다" "B쉼터는 여자 외출 제한이 너무 빡빡해 비추(비추천)한다"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온라인으로 쉼터 정보를 구하면서 가출청소년들이 움직이는 범위도 넓어졌다. 청소년쉼터협의회 김기남 회장은 "스마트폰을 쓰기 전 가출청소년들은 원래 생활권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 곳에 정보를 공유하고 돌아다녔지만, 지금은 전국에 어느 쉼터가 좋은지 아이들이 더 잘 알고 직접 그 지역 쉼터에 입소 문의도 남긴다"고 밝혔다. 전화비 낼 돈이 없는 아이들이라 와이파이가 가능한 곳에서 문자로 서로 연락한다고 한다.
서울 금천청소년쉼터에서 생활하는 17명 청소년도 대부분 서울 외 지역 출신이다. 박 팀장은 "집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가출청소년들 특성상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단순히 구속받기 싫어서 쉼터 여러 곳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에게 맞는 곳을 찾아 여러 쉼터를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쉼터 투어'가 쉼터 거부보다 낫다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가출 경험을 고려할 때 실제 가출청소년은 2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쉼터를 이용한 청소년이 3만명을 넘었지만 사각지대에 놓인 가출청소년은 여전히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다. 쉼터를 거부한 가출청소년을 두고 청소년쉼터와 가출팸(가출청소년끼리 모여 사는 것)이 일종의 경쟁을 벌인다. 청소년쉼터는 거리상담과 온라인상담을 통해 쉼터 정보를 알리고 유도하고 있지만, 가출청소년들은 가출팸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쉼터협의회 김 회장은 "가출팸에 들어가기 전에 쉼터에 올 수 있도록 최근 온라인상담을 확대하고 있지만, 쉼터에 대해 잘 모르거나 공공기관에 대한 불신이 있는 청소년들이 욕부터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 청소년자립지원과 박재현 주무관은 "드물게 마음 맞는 청소년끼리 동거하는 형태도 있으나 대개의 경우 여자아이들은 조건만남을 강요받고 남자아이들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갈취당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가출청소년이 일시→단기→중장기 쉼터 순으로 경험하면서 사회에 복귀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당장 위험에 놓인 가출청소년이 쉼돌이·쉼순이가 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평가한다. 최순종 경기대 청소년학과 교수는 "짧게라도 쉼터를 찾는 청소년들은 가정과 사회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라며 "쉼터 자체를 거부하는 나머지 청소년들은 범죄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김승희 의원(자유한국당·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이 6일 여성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3년간 전국 청소년쉼터 재입소자 현황'에 따르면 쉼터 입소자의 13~16%는 이전에 쉼터 생활 경험이 있는 가출청소년들이다. 쉼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로 나갔다가 다시 쉼터로 들어온 경우다. 김 의원은 "쉼터를 찾은 청소년들이
다시 거리로 나가지 않도록 퇴소·재입소 이유를 꼼꼼히 분석하고 앞으로 사업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와 청소년쉼터협의회는 매년 여름 휴가철과 수능시험 때 가출청소년 집중 거리상담에 나선다. 청소년쉼터협의회 김기남 회장은 "청소년쉼터는 가출청소년들에게 응급실이나 마찬가지"라며 "쉼돌이, 쉼순이여도 좋으니 언제든 들러서 쉬다 가라"고 말했다.
박경미 의원 박재현 주무관 최순종 교수 김승희 의원 김기남 회장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1/17/20171117021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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