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知力 2017] 게으름 아닌 보약… 압축 성장에 희생당한 '잠'의 復權

유석재 기자

입력 2017.02.15 03:04


[잠의 재발견]

"일찍 일어나서 일 해야 성공"
학교와 일터가 잠 죄악시하며 각성제·새우잠의 효과 미화
"알고보니 충분히 자야 성공한다" 뒤늦게 의미 되찾은 '수면'

"국민(초등)학교 5·6학년 학생의 33%가 각성제를 상용하고 있다." 지금 보면 '설마 그럴 수가!'라며 놀라 자빠질 만한 이 수치는 1967년 보건사회부의 실제 조사 결과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은기수(사회학) 교수와 문현아(정치학) 강사가 최근 학술지 '사회와 역사'에 발표한 논문 '한국 근대화 시기의 성공, 희생과 수면'에서 인용한 것이다. 논문에 실린 당대의 약 광고를 보면 그런 분위기가 되살아난다. '잠을 쫓는 약, 입학기는 다가온다!'(1960년 카페나) '정신활력제 드듸어 국산화!'(1961년 아나뽕) 같은 각성제 광고가 버젓이 신문에 실리고 있었다.

미국 온라인 매체 허핑턴포스트의 창립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최근 저서 '수면 혁명'에서 마치 한국인들이 새겨들으라는 듯 이렇게 말한다. "하루 4~5시간씩만 자고서도 완벽하게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수면 부족이 성공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라는 집단 환상에 빠져 살아왔다." '충분히 자야 성공한다'는 뜻밖의 조언 앞에서, 인터넷상 독자 반응은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간증'을 방불케 할 정도다. "여태껏 잠이 이렇게 중요한 줄 모르고 살았다니, 인생 헛살았다." "학창 시절에 '4당 5락'(4시간 자면 대학에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란 말을 듣고선 넉넉히 자는 게 나쁜 것인 줄만 알았다."

아리아나 허핑턴, '수면혁명'


잠의 새삼스러운 '복권'

'잠'이 복권(復權)되고 있다. '알고 보니 잠이 보약'이라는 말엔 좀처럼 농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린이는 12시간, 청소년은 9시간, 성인은 7시간 30분 이상 잠을 자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를 본 뒤 15시간이 지나면 잠을 자게 하는 호르몬인 멜라토닌이 뇌에서 분비돼 잠이 오는 것이 정상이다'는 의학적 조언들이 새삼 힘을 얻는 것이다.



수면 부족이 기억력 감퇴나 시력 저하의 원인으로까지 지목되는가 하면, 이달 초엔 '수면 시간이 짧아지면 비만 위험이 커지게 된다'는 일본 와세다대 스포츠과학학술원 등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사흘 동안 매일 3시간 30분씩 잔 사람은 같은 기간 7시간씩 잔 사람에 비해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이 10% 이상 감소했다는 것.  세계 곳곳에서 이런 '잠의 재발견'이 이뤄지는 것일까? 그것은 일에 치여 사는 현대인이 오랜 세월 하루 7~8시간 '정상 수면'조차 버거울 정도로 힘겹게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반성(反省)인 셈이다. 특히 짧은 시간 압축 성장을 이뤄낸 한국인의 삶에서 '잠'은 곧 '게으름'의 동의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은 어린 시절부터 '둥근 해가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아야' 했고,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식의 격언을 진리로 알아야 했다.

"한국의 근대화는 잠을 희생시켰다"

은기수 교수 등이 쓴 학술 논문의 요지는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근대화가 학생들의 치열한 공부와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을 요구하면서, 학교와 일터 모두 잠을 죄악시하고 일상생활에서 쫓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잠은 게으름의 상징을 넘어서 후진적·부정적 성향으로까지 자리매김됐다. 학교의 '각성제'와 일터의 '새우잠'은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미화되기 일쑤였다.

은 교수 등은 "1970년대 초의 노래 '아침이슬'의 첫 구절도 '긴 밤 충분히 잘 자고'가 아니라 '긴 밤 지새우고'였다"고 지적하고, 온 국민이 의식적으로 잠을 적게 자려고 했던 사회 풍토가 있었다고 했다.

그 풍토는 지금도 6.3시간(2016AIA생명 조사)인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이 아시아·태평양 지역(평균 6.9시간) 중 꼴찌라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50여년 만에 이뤄지는 '잠의 복권'은 한국의 20세기적 풍토에 대한 또 다른 탈출 모색인 셈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15/20170215001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