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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하트 그려진 씨앗이 맺은 '풍선 같은 열매'… 그 이름은 '사랑'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19.10.31 03:12


화가가 선물로 준 '풍선초' 씨앗 한 알, 화분에서 기적처럼 자라
열매와 씨앗에 담긴 뜻은 '풍선' '심장' '사랑'… 범속한데 특별해
하나의 씨앗엔 절반은 과거, 절반은 미래… 내 안에도 마찬가지


그런 선물은 난생처음이었다. 씨앗 한 알. 하트 모양이 그려진 씨앗이다. 화가의 작업실에 놀러갔다가 받았다. 콩알보다는 작고 팥알보다는 큰 씨앗을. 씨앗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씨앗인지, 아니면 가공물인지를 두고서 말이다. 나는 화가가 하트 모양을 그려 넣은 알갱이를 만든 거라고 주장했다. 그가 하는 작업과는 달랐지만 일종의 유희이겠거니 했다. 핀셋에 온 신경을 모으고, 검정 바탕을 칠한 후 이어서 흰색으로 하트를 칠하는 화가의 휴식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돌아온 화가가 "씨앗이에요"라고 했지만 우리는 메타포를 쓰는 존재들답게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정말 씨앗이었다. 풍선 같은 열매가 열린다고 했다. 그래서 풍선초라고 한다나?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씨앗을 심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풍선처럼 생긴 열매들이 달린 줄기가 얽혀 있는 사진이다. 그런 형체를 본 적이 없는 나는 잠시 멍해졌다. 사진이 내 안의 뭔가를 건드렸던 것이다. 조성연 작가의 2016년 작 'Balloonplant', 그렇게 인쇄되어 있었다. 벌룬플랜트? 바로 풍선초였다. 난 그제야 나를 단숨에 사로잡은 식물의 사진이, 내가 얼마 전에 받은 씨앗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알게 되었다. 영어로도 '풍선초'다. 그러니까 정말 벌룬플랜트. 메타포로서 벌룬플랜트로 쓴 게 아니라 그 식물의 실제 이름이 벌룬플랜트였다. 이 사진은 월간지인 '현대문학'에 실려 있는데, 나는 뒤늦게 어떤 필요로 현대문학 과월호를 구매했다. 그리고 이 사진을 우연히 발견했던 것이다. 풍선초 씨앗을 받은 것도, 화가의 작업실에 간 것도 우연이었다. 몇 겹의 우연이, 풍선초와 나 사이에 심겨 있었다.

  풍선초, 조성연+작품집



이제 그 씨앗은 내게 없다. 흙에 묻혀 초록 줄기와 잎사귀로 변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자라고 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 나처럼 화초를 키우는 데 재능이 전무한 사람이 이런 대견한 일을 했다니. 일회용 인공눈물 통에 넣어 발아시켰다. 열흘이 지나도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20일이 지나자 뭔가가 변했다. 씨앗에 금이 간 것이다. 며칠을 더 놔뒀지만 변화가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화분에 심었다. 그런데 싹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밤새 자란 게 보였다. 철제 옷걸이를 펴서 지지대를 해줬더니 그걸 타고 상승하고 있다. 다섯 개 손으로 야무지게도 잡고서. 기적이다. 나는 저런 야무진 걸 '넝쿨손'이라고 한다는 걸 처음으로 인지했다. 새로운 단어를 알게 되거나, 알았으나 쓰지 않던 단어를 쓰는 순간이 올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을 받는다.

풍선초는 '풍선덩굴' 또는 '풍경덩굴'이라고도 한다. 매달린 풍선이 풍경이 된다는 '풍경덩굴'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영어로 'love in a puff'라고도 한다. 한국말로는 옮기기 애매한데, '공기 방울 속의 사랑'이라고 하면 좋을까. 또 'heartseed'라고도 한다. '하트 씨앗'이라는 일부로 '풍선초' 전체를 비유하는, 일종의 제유법이다. 또, 풍선초 씨앗은 'loveseed'다. '풍선'과 '사랑'과 '심장'이 한데 있는 식물이라니. 범속하되 범속하지 않은 단어들의 집합이다. 생김새나 이름이나, 풍선초는 여러모로 시적 몽상을 일깨우는 식물인 것이다.

매일 풍선초를 보면서 비로소 헤겔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식물은 씨로부터 출발하는데, 동시에 씨는 식물의 삶 전체의 결과라는 말을 말이다. 헤겔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한편으로는 출발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과물이기에 씨는 다른 것이면서 그럼에도 동일한 것이다. 어떠한 개별자의 산물이면서 다른 개별자의 출발점인 것이다."(올리비아 비앙키 저, '헤겔의 눈물', 김동훈 역, 열린책들) 하나의 씨앗에는, 씨앗의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는 말로 나는 이해했다. 절반은 과거, 절반은 미래다. 현재 안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내 안에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다. 나 또한 누군가들의 '씨앗'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씨앗에서 생명을 받은 어떤 씨앗들의 '미래'이기도 한 것이다. 그 씨앗과 어떤 면에서는 동일하지만 동시에 상당히 다른 결과물. 이렇게 생각하니 창밖 나무들의 느낌이 다르다.

  인공눈물, 헤겔, 헤겔의 눈물

세상의 소리가 들린다. 과거와 미래를 한데 품고 있는 씨앗들이 발아하고, 싹을 틔우고, 자라는 소리가. 이제는 씨앗이 아니게 되어버린 씨앗의 심장이 속삭이는 소리가. 잠시 세상의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와 내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게 현재는 미래가 되어가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30/20191030031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