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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김정일 "쭈더가 누군가" 호통 中사령관 이름 다시'주덕'으로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7.06 03:00


[아무튼, 주말- 평양 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한국에 정착해 아직도 어려운 게 외래어다. 영어와 중국어를 수십 년 동안 사용한 외교관 출신인 내가 이럴진대 아마 다른 탈북민은 더 적응이 어렵지 않을까 싶다. 표현법이 완전한 다른 외래어는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나오지 않지만 표현법이 비슷한 외래어는 아직도 헷갈린다. 지금도 가끔 글을 쓸 때 러시아를 '로씨야', 시진핑을 '습근평'으로 했다가 옆에서 수정해 준다.

북한에서는 외래어는 그대로 쓰지 않고 최대한 우리말로 순화해 사용하려고 한다. 컴퓨터가 처음 북한에 도입됐을 때 컴퓨터를 '전자계산기'라고 했다. 대학 명칭도 평양전자계산기단과대학, 종합대학 학부도 전자계산기학부 등으로 불렀다. 이후 학자들이 컴퓨터의 기능은 단순 계산뿐만 아니라 정보 처리 능력에 있다면서 적당한 우리말 표현을 찾았지만 딱 맞는 표현을 찾는 데 실패했다. 결국 그대로 '콤퓨터(컴퓨터)'로 쓰기로 했다.



남한은 분단 이후 미군이 들어와 영어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북한은 소련군이 진주하다 보니 1960년대 초반까지는 러시아어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땅크(탱크), 뜨락또르(트랙터), 끄라찌(클러치), 마라손(마라톤), 프로그람(프로그램), 유모아(유머) 등이 러시아식 외래어이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서 영어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하면서 영어가 필요해졌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러시아어가 영어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1980년 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영어식 표현이 더 늘어났다. '윈도우' '프로그람' '쏘프트웨어' 등 영어 외래어가 급속히 퍼졌다. 반미(反美)를 앞세우는 북한에서 지금은 영어식 외래어가 제일 많다.

한때 중국어 표기법을 놓고 혼란이 생겼던 적이 있었다. 2000년대 초 김정일이 한국 신문과 TV를 많이 보기 시작하면서 중국 지도자와 지명 표기법이 달라 혼란스럽다며 중국어를 남한처럼 현지 발음대로 표기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갑자기 북한의 모든 출판물과 국가 기관 문건에서 중국식 발음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김정일이 외무성에서 보고한 문건을 읽다가 버럭 화를 냈다. '쭈더가 누군가?' 공산 중국 건국의 1등 공신이었던 '주덕(朱德)' 총사령관의 중국어식 표기였다. 김정일의 호통 한 번으로 다시 원상 복귀해 한자식 발음법대로 표기했다.

1990년대엔 국명과 외국 지명을 현지 발음에 따라 표기하기로 했다. 독일은 도이췰란드, 오지리는 오스트리아, 화란은 네데를란드(네덜란드), 토이기는 뛰르끼예(터키), 희랍은 그리스, 세르비아는 쓰르비아, 호르바찌아는 흐르바쯔까(크로아티아), 상아 해안은 꼬뜨디바르(코트디부아르) 등으로 바뀌었다.

외래어 표기에서 남북한의 가장 큰 차이는 된소리 표기이다. 남한은 파열음 표기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나 북한은 이를 허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의 경우 'n, t, k'는 'ㅃ, ㄸ, ㄲ'로 적는다. 일본 말의 경우 'か(카)', 'た(다)'가 단어의 중간이나 끝에 오면 된소리로 적는다. 오사까(오사카), 도꾜(도쿄), 나가사끼(나가사키) 식이다.

일부 북한 외래어에는 그 어원이 명백하지 않은 것도 있다.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3자 정상회담 때 한국 언론들은 김정은이 입은 옷을 '인민복'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닫힌 양복'이라고 하고 주민들은 '쯔메리'라고 한다. '쯔메리'의 어원이 어느 나라 말에서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북한에서는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려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쓰라고 한다. 얼음보숭이는 아이스크림, 가락지빵은 도넛을 이르는 북한 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스크림과 도넛을 우리 말로 참 재치 있게 표현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이 외국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것을 억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한국은 외래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통일이 되면 언어 문제가 분명 대두할 것이다. 북한이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잘 살펴보면서 수용할 만한 것은 없는지, 언어 사용의 차이를 좁힐 방법은 없는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7/05/20190705021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