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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50만명 어린이 구할 황금쌀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입력 2019.11.26 03:15


비타민A 결핍 막는 황금쌀, 방글라데시에서 첫 재배 허가
에볼라 항체 만드는 담뱃잎, 간염 백신용 옥수수도 개발
국내서도 약 되는 쌀 개발… GMO 반감에 보급 길 막혀


부모님은 늘 "밥 먹었느냐"고 묻는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걱정거리가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건만 그냥 밥만 챙긴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밥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도록 해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밥은 곧 하늘"이라 했고, 김지하 시인도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이라고 했다.

밥이 정말 하늘과 같은 존재임을 보여주는 일이 최근 일어났다. 지난달 말 방글라데시 언론들은 환경부가 비타민A를 만들도록 유전자가 변형된 황금쌀을 허가했다고 보도했다. 방글라데시 어린이의 21%가 목숨까지 위협하는 비타민A 결핍 상태로 알려졌다. 황금쌀로 지은 밥 한 그릇으로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인체는 당근을 주황색으로 만드는 색소인 베타카로틴을 식품을 통해 흡수해 비타민A로 만든다. 쌀은 이 베타카로틴이 크게 부족하다. 우리야 시금치 같은 다른 식품을 통해 보충할 수 있지만 영양을 쌀에만 의존하는 방글라데시 같은 개발도상국에서는 문제가 심각하다. 어린이가 비타민A가 부족하면 시력을 잃고 심하면 면역력 약화로 사망에 이른다. 한 해 50만명이 넘는 어린이들이 비타민A 결핍으로 목숨을 잃는다. 황금쌀은 이들을 구할 약이 될 수 있다.

황금쌀은 1999년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의 잉고 포트리쿠스 교수와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의 페터 바이어 교수가 공동 개발했다. 이들은 농업기업 신젠타와 함께 옥수수에서 베타카로틴을 만드는 유전자를 쌀의 유전자에 끼워 넣어 황금빛을 내는 쌀을 개발했다. 연구진은 이후 황금쌀 개발 기술을 공익 목적으로 쓰라고 기부했다. 필리핀 국제쌀연구소는 이 기술로 방글라데시의 건조한 기후에서 잘 자라는 품종의 쌀에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넣어 이번에 허가받은 황금쌀을 만들었다. 방글라데시 연구진은 이 황금쌀이 비타민A가 많다는 것 외에 품질에서 기존 쌀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밝혔다. 황금쌀은 지난 2년 동안 환경부 심의를 거쳐 정부 허가를 받았다.


황금쌀은 앞서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서 먼저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쌀이 주식이 아니라 비타민A 결핍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이 때문에 황금쌀 재배 허가가 아니라 판매 허가를 내줬다. 황금쌀을 실제로 재배하는 나라는 방글라데시가 처음이다. 현지 과학자들은 야외 재배 시험을 통해 농업부의 종자 안전성 시험을 통과하고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농가에서 상용 재배가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농민이나 소비자들이 황금쌀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유전자 변형 농작물(GMO)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황금쌀에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GMO는 원래 작물에 없던 외부 유전자를 갖고 있어 생태계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과학자들은 이에 대해 자연에서도 식물 20종 중 한 종꼴로 차나 바나나처럼 외부 생물인 토양 세균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GMO는 단지 오늘날 과학기술로 이런 과정을 빠르게 한 것뿐이란 말이다. 반대론자들은 또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황금쌀의 영양 효과가 별로 없다고 밝혔다는 점도 근거로 든다. 이 역시 쌀을 그다지 소비하지 않는 미국인에게 해당되는 결과이지 쌀이 주식인 방글라데시 어린이는 다르다고 과학자들은 반박한다.

황금쌀처럼 농작물을 질병 치료제로 개발하려는 시도는 최근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14년 서아프리카에서 에볼라가 창궐했을 때는 담뱃잎이 환자 치료에 동원됐다. 당시 일부 서방 의료진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내성을 보였다. 의료진은 이들의 혈액에서 항체를 추출해 환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환자 수에 비해 혈액량은 태부족이었다. 과학자들은 항체 형성 유전자를 담뱃잎 유전자에 끼워 넣어 대량생산했다. 미국 바이오 기업인 어플라이드 바이오테크놀로지 인스티튜트는 B형 간염 항체를 만드는 유전자 변형 옥수수를 개발했다. 이 회사는 나중에 수확한 옥수수로 과자 형태의 백신을 만들면 백신 용액을 보관할 냉장 시설이 부족한 저개발 국가에 유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해 미국과 독일, 브라질 공동 연구진은 외부 유전자 대신 야생 토마토의 자체 유전자를 이용해 항암 성분인 리코펜을 시판 중인 방울토마토보다 5배나 많이 함유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국내에서도 이미 2008년 국립농업과학원에서 밥 두 공기만 먹으면 하루 비타민A 권장량을 충족하는 황금쌀을 개발했다. 당시 연구진은 고추의 베타카로틴 유전자를 쌀에 넣었다. 하지만 GMO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아직까지도 연구실에만 남아있다. 밥이 하늘이면서 약이 되는 날이 되려면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다.


최시형, 김지하, 잉고 포트리쿠스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1/25/20191125035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