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성결대 교수·경제학자
입력 2022.03.10 03:00
코로나로 학교 도서관 프로그램 중단, 청소년 도서 시장도 위기
가난한 아이도 책 읽을 수 있는 환경 만들어야 빈곤 대물림 벗어나
도서관의 꽃은 국회도서관 아냐… 새 정부, 미래의 씨앗에 투자를
어렸을 때에는 누가 나더러 천재라고 말하는 게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대학을 연세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후로 천재 소리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떨어졌다. 경제학 전공인데 프랑스로 유학 간 나는 학계의 ‘2등 시민’이 되었고, 생태경제학으로 논문을 쓴 이후로는 비주류에서도 비주류로 나머지 인생을 지내게 되었다. 나는 지금처럼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고 조용히 사는 인생이 좋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학교 도서관 열쇠를 주셨다. 그림책이 쭉 꽂혀있던 책장 앞에서 황홀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중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 대표로 영등포 도서관에서 진행한 독서 프로그램에 참가해 독후감 쓰고, 읽은 것도 기억이 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무슨 얘기인지 끝내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 대신 나는 펄벅의 ‘대지’가 너무너무 재밌었다. 대학원 진학 시험 준비하던 시기에는 우파 대통령이었던 퐁피두의 이름을 딴 퐁피두 도서관 옥상에서 에스프레소 한잔 마시면서 넓게 파리 전경을 보는 게 내 나름의 낭만이었다. 그리고 경제학 책만 모아서 엄청나게 큰 방 하나를 채운 파리 10대학 도서관에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한국의 초등학교 4학년은 책을 1년에 평균 87.3권 본다. 중2는 17.3권, 고1은 8.8권을 본다. 성인은 7.3권, 두 달에 한 권 약간 넘는 책을 본다. 그나마 이게 팬데믹 이전인 2019년 통계여서 지금은 이것보다 훨씬 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와 함께 학교 도서관이 문을 닫았다. 도서관은 뜨문뜨문 문을 열었어도 학교 도서관의 각종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몇 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0대용 도서 시장은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했고, 인터넷 서점들은 10대를 위한 별도 코너를 없앨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책이 ‘올드 매체’라서 그런 거고, 지식은 “유튜브에 다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지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책이 갖는 역할, 특히 길게 생각하고 많은 텍스트를 소화하는 능력은 여전히 책이 가진 매력적 기능이다. 독서 능력에서 빈부가 갈린다는 이유로 가난한 어린이들도 책을 읽게 하자는 게 영국 등이 주도하던 ‘뉴 스타트’ 운동이다. 청소년은 책을 안 보려고 하지만, 어떻게든 책을 더 읽게 하려는 게 선진국들이 주로 가는 방향이다.
학교 도서관을 운영하는 사서 교사는 2007년에 전국 532명, 2017년 720명이었다. 2021년에는 1403명이다. 학교 도서관에 사서 교사를 배치하도록 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고,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도서관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것은 더 최근 일이다. 사서 교사 확충이 이제 작지만 그래도 엄연한 정책 이슈가 되었다. 교사와 사서, 양쪽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당장 늘리기가 쉽지 않다.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정부가 바뀌고 교육감이 바뀌고 담당자가 바뀌면 흐름이 바뀔 수 있으니까 여기에 인생을 걸기도 어렵다. 어쨌든 사서 재교육 등 문제를 아주 못 풀 건 아니라고 본다. 문제는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도서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것 아닌가 한다.
청소년 책이 잘 안 팔리니까 청소년 책 출간도 점점 줄어든다. 코로나 이후로 학교 도서관이 다시 열릴 것이다. 규모가 큰 학교 도서관에는 사서를 여러 명 두고, 초등학교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배치하는 게 좋다. 도서관에서 질 좋은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해서 학생들이 도서관을 즐거운 곳으로 이해하는 게 지식 경제가 살 길이다. 도서관은 전 세계적으로 좌우 없이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다.
도서관의 꽃은 국회 도서관이 아니라 학교 도서관이다. 가난한 지역, 소외된 지역, 이런 곳의 학교 도서관을 즐겁고 신나는 곳으로 만드는 것, 새로운 정부가 이런 데 좀 더 신경 쓰기를 바란다.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나는 매일 도서관에 다녔고 그곳에서 지식과 지혜와 꿈을 얻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말이다.
학교 도서관을 좋게 만드는 것, 지역 도서관을 정비하는 것은 그 효과가 당장 눈에 띄지는 않는다. 결국 도서관은 인간을 키우는 사업이라, 길어야 10년을 목표로 하는 일반 비즈니스와는 다른 시간의 차원을 갖는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다. 그들 모두가 더 좋은 장비를 갖는 게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도움을 준다. 학교 도서관은 이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공적 장비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3/10/NTMH4FI7RFHE3A7DHKDTUSTY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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