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입력 2022.05.12 03:00
TV 예능 보고 가입한 ‘풋살 클럽’서 함께 땀 흘리며 공 차는 기쁨 느껴
여자가 체육 열심히 하면 “독하다”… 어릴때부터 평등한 기회 누렸다면?
늦은 밤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길, 동네 운동장에서 웃통 벗은 남정네들이 미친 듯이 공을 차는 모습을 혀를 끌끌 차며 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에는 남자 동기들이 축구화에 유니폼에 온갖 장비를 다 챙겨 입고 조기 축구를 하는 모습을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2002년 월드컵에 대한 추억도 없다. 그랬던 내가 공에 미쳐버렸다.
시작은 TV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이었다. 설 특집으로 방영한, 여성 연예인들이 팀을 꾸려 풋살 대회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이 딱히 새롭진 않았다. 남성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뭉쳐야 찬다’가 방영 중이고 학창 시절 방영했던 ‘날아라! 슛돌이’까지 TV에서 축구 예능을 보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프로그램을 이끄는 주체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것, 하나였다. 그렇게 시큰둥하게 시청하기 시작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송 내내 찔찔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여자 풋살 클래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여성 스포츠 단체의 풋살 1일 강좌에 등록했다. 누군가 내게 승부욕이 있는 편이냐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해오며 살았다. 어쩌면 “여자가 너무 기가 세면 안 돼” 같은 맥락으로 승부욕을 보이는 것부터가 여성들에게 허용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친구만 해도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너무’ 열심히 하는 바람에 뒤에서 남자애들에게 “독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으니까. 자연스럽게 운동은 ‘적당히’만 하며 살아온 내가 공에 발이라도 한번 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풋살장에 들어섰다.
악착같이 공을 따라 뛰었다. 한 시간을 쉼 없이 내달렸다. 헛구역질이 나 구장 밖으로 뛰쳐나갈 때까지. 집에 와 땀내에 전 몸을 씻어내며 든 생각은 내가 한 번도 공을 따라 뛰어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여학생들에게 시켰던 구기 종목은 주로 ‘피구’였다. 남학생들이 운동장 가운데서 축구할 때 우리는 남는 자리에 운동화 앞코로 대충 직사각형을 그려 피구 경기를 했다. 피구의 목적은 단 하나, 상대 몸에 공을 맞히는 것. 경기에서 이기려면 공에 맞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도망 다녀야 하고, 팀워크보다는 각자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종목이었다. 공에 ‘맞는 것’이 싫어 체육 시간을 점차 멀리하던 친구들이 생각난다. 안타깝지만 초중고 12년간 학교에서 그 외에 다른 구기 종목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었다. 농구는 골대 앞에 서서 공을 10번 던져 몇 번 성공시키는지, 배구는 토스를 몇 번 성공시키는지와 같이 정확히 점수를 내기 위한 수행 평가로 접해본 것이 전부였다.
원데이 클래스를 다녀온 후, 정식으로 풋살 클럽에 입단했다. 큰돈은 아니지만 매달 고정 지출이 늘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나가야 한다. 사실 그 정도면 감사하다. 선택지가 많지 않아 훨씬 더 거리가 먼 클럽이 태반이었으니까. 더 이상 혼자 운동할 때처럼 속으로 하나, 둘 숫자를 세며 운동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하는 팀원들에게 “나이스”를 외치거나 하이 파이브를 하러 달려간다. 풋살 대회라도 있는 달에는 풋살에 인생을 바친 사람들처럼 아침이고 밤이고 모여서 훈련한다. 친구에게 이런 내 근황을 전했더니 그의 회사에는 요일별로 남자 직원들의 축구 동호회 스케줄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순수하게, 배가 아플 만큼 부러웠다. 상상해 본다. 우리도 남학생들처럼 마땅히 어려서부터 넓은 운동장을 누비며 팀 스포츠를 배울 기회를 누렸다면 어땠을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5/12/VICESYSUIBH7LBRT6OYUTVVJ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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