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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김성윤의 맛 세상] 복날 음식 ‘천렵국’을 아시나요

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22.07.12 03:00

/일러스트=이철원

가을 기운이 고개 내밀었다가 ‘앗 뜨거워라’ 놀라 납작 엎드린다는 초복
예부터 복날에 먹는 ‘복달임’ 음식으로 민물고기 끓인 ‘천렵국’ 즐겨
짱뚱어탕·말미잘탕도 여름 보양식… 지역 따라 쉽게 잡히는 재료 사용

오는 16일(토요일)은 연중 가장 덥다는 복날(초복)이다. 엎드릴 복(伏) 자를 쓰는 건, 가을 기운이 여름에 밀려 엎드렸단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를 지나면 해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땅속에 움츠려 있던 가을 기운이 ‘내 세상이 왔나’ 싶어 고개를 땅 밖으로 내밀었다가 앗 뜨거워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에 놀라 바짝 엎드린단다. 가을 기운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나마 견딜 만할 텐데 납작 엎어졌으니, 푹푹 찔 수밖에 없다.

복달임은 ‘복’에 무언가를 달여 먹는 탕을 뜻하는 ‘달임’이 붙은 말이다. 전통적 복달임으로 흔히 개나 닭을 떠올린다. 하지만 달걀 낳아주는 닭과 집 지켜주는 개를 잡아먹으려면 과거에는 꽤 큰 재산상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조상들은 천렵국을 먹었다. 천렵이란 냇가나 강가에서 헤엄치고 고기도 잡으며 하루를 즐기는 놀이다. 이때 먹는 음식이 천렵국이다.

요즘은 어탕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듯하다. 쉽게 말해 민물 생선 매운탕이다. 피라미, 꺽지, 모래무지, 미꾸라지, 붕어 등 개울에 망을 쳐서 잡은 민물고기를 솥에 넣고 물을 부어 푹 삶아 체에 밭쳐 생선 뼈를 발라낸다. 된장, 고추장, 고춧가루, 생강, 들깻가루 따위 양념을 풀고 국간장으로 간한다. 한소끔 끓으면 호박, 양파, 깻잎, 미나리 등 채소를 더한다. 여기에 국수를 말면 어탕 국수가 된다. 국수 대신 수제비를 떠 넣으면 어탕 수제비, 밥을 말아서 끓이면 어죽이 된다.

음식이 유달리 발달했던 개성에서는 천렵국도 특별하게 끓였다. 민물 생선에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더해 다른 지역 천렵국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한식당 ‘용수산’ 창업자 고(故) 최상옥(1928~2015년) 여사는 자전적 음식 에세이 ‘사랑만 한 음식 없고 정성만 한 양념 없다’에서 “천엽국(그의 말씨를 따르자면)”을 생생하게 추억했다.

“가장 먼저 솥 안에 들어가는 것은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다. 살이 무르게 익도록 고기를 삶아 건져내면 다음엔 민물고기들을 그 국물에 넣고 살이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끓인다. 거기에 수제비를 떠 넣은 다음 열무와 깻잎, 미리 건져서 양념해놓은 세 가지 고기와 참깨를 넣어 된장과 고추장으로 양념해 또 한소끔 끓인다. 차가운 강물에서 한껏 놀아 오들오들 소름이 돋은 몸은 김이 펄펄 나는 한 그릇에 또다시 뜨거워진다. 고기를 푹 고아 진득진득, 눅진눅진하게 된 국물이 입에 착착 달라붙고, 갖가지 고기와 민물고기가 함께 어우러진 그 맛은 구수하면서도 담백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이열치열이라, 더위는 어느새 성큼 물러나고 있었다.”

흔하고 쉽게 잡히는 거로 천렵을 한 건 내륙이나 바닷가나 마찬가지다. 갯벌이 발달한 서남해안 지역에선 ‘짱뚱어탕’을 여름 보양식으로 즐긴다. 짱뚱어는 물고기지만 가슴지느러미로 갯벌 위를 걸어 다니는데, 머리 위 툭 튀어나온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다 적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펄 속으로 숨는다. 날렵한 짱뚱어가 갯벌에 올라오면 낚싯바늘 4개를 줄에 매달아 낚아채는 ‘훌치기낚시’로 잡는다. 그물로 주로 잡는 민물고기보다는 훨씬 천렵의 본뜻인 ‘물에서 하는 사냥’에 가깝다. 짱뚱어탕 끓이는 법은 천렵국과 비슷하다. 맛도 얼큰하고 구수하면서 담백하고 시원한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

부산 기장에서는 대표적 하등동물 말미잘을 여름철 보양식으로 먹는다. 기장 학리 일대에서 말미잘을 탕으로 끓여 먹은 지 30여 년쯤 됐다니,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붕장어 잡으려 던져둔 낚싯바늘에 말미잘이 심심찮게 달려 올라왔다. 처음에는 흉측해 버렸지만, 차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물메기탕 끓일 때 말미잘을 잘라 넣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고, 말미잘탕으로 독립했다. 어부들이 잡으면 “재수 없다”며 도로 바다에 던져 넣었다고 ‘물텀벙’이라고 하다 이제는 귀한 대접 받는 아귀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학리 한 식당 입구에는 ‘말미잘 십전대보탕’이라고 쓰여 있었다. 주인은 “말미잘 효능이 보약 한 제와 같다며 의사 손님이 붙여준 별명”이라 했다. 말미잘을 많이 먹으면 입술과 혀가 살짝 얼얼하다. 독성을 소량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장에선 이 독성이 위장과 간에 좋다고 주장한다. 실제 과학자들이 말미잘에게서 항균과 마취 효과가 있는 ‘크라시코린’이라는 생리 활성 물질을 발견하기도 했으니,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닌 듯하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7/12/K76XWP5NBVHC5L7HI72PR5XKU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