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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현모의 실록 속으로] 성군에서 혼군으로… 인조는 언제 무엇을 놓쳤나?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입력 2023.04.04. 00:10 업데이트 2023.04.04. 05:31

광해군 몰아내고 “盛世 다시 왔다”는 환호 받으며 즉위한 인조
개혁 포기하고, 친족에 사사로운 조처 내리며 4년만에 민심 잃어
대기근에 왕족 재산 축소한 세종처럼 모범 보였다면 어땠을까

일러스트=이철원

‘하·은·주 삼대(三代)를 만회할 뜻이 있었으나, 숱한 재난으로 뜻대로 정치를 펼치지 못한 임금’. 조선 16대 국왕 인조에 대한 최종 평가이다. 실제로 인조는 즉위 직후 일어난 ‘이괄의 난’을 비롯해 정묘·병자호란 등 가장 많은 내우외환에 시달린 왕이다. “어짊[仁]을 자기 소임으로 삼았다[仁爲己任·인위기임]는 백헌 이경석의 말과 달리, 그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까지 유배 보냈다.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죄 없는 백성을 다른 나라 포로가 되게 해, 아비가 자식을 보호하지 못하고 지아비가 지어미를 지키지 못하게” 한 군주가 바로 그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623년 3월 12일(양력 4월 1일)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백성들은 “오늘날 성세(盛世)를 다시 볼 줄 몰랐다”고 환호했다. 하지만 불과 4년 뒤인 1627년, 후금이 침입했을 때 백성들은 “성 안에서 내응”하거나 “창 뿌리를 거꾸로 하며 반역”했다. 즉위 후 정묘호란까지 실록을 되읽으면서 발견한 인조의 첫 번째 실수는 개혁의 중도 포기였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국정 목표로 민생 안정[安民], 인재 등용[用人], 군제 개혁[詰戎]을 내걸었다. 민생 안정의 대표 법안 대동법은 영의정 이원익의 주도로 1623년 9월 충청·전라·강원도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 법은 반대 여론에 밀려 다음 해 가을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 시대 주민증이라 할 수 있는 호패(號牌) 제도는 군제 개혁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최명길과 이귀 등이 추진한 이 제도 역시 군 복무를 꺼리는 사족(士族)들의 반대로 중도 폐지되었다. 시행한 지 1년 만에 226만여 백성이 호패를 착용했지만 “민심 동요가 적국(敵國)의 변란보다 더 참혹하다”며 반발하는 언관들의 반대를 인조는 넘어서지 못했다.

민심의 동요는 왕의 사사로운 조처에 의해 악화됐다. 정묘호란 발발 일 년 전인 1625년 1월, 왕의 생모 계운궁이 사망했다. 인조는 예법에 안 맞는다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장급 장례를 치렀다. 인정(人情)을 내세워 왕 자신이 상주가 되어 3년 복을 입겠다고 고집하는 왕과 예법을 내세워 반대하는 신하들의 대립 속에 거의 두 달간이나 국정이 마비됐다. 그뿐 아니었다. 상중(喪中)에 있어서 급여를 받을 수 없는 친동생에게 인조는 ‘측은하다’면서 국가 창고를 열어 쌀을 내려주게 했다. 고모 정명공주 집을 수리해주라고 호조에 지시해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왕이 이처럼 즉위 초 내건 국정 목표와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여헌 장현광은 “천하의 일은 날마다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날마다 퇴보한다”며 떠나갔다. 원자의 교육을 이유로 잠시 조정에 나아갔던 사계 김장생 역시 “근래 전하께서 다스리기를 도모하시는 정성을 보건대 점점 처음만 못하다”면서 사직했다.

인조의 사사로운 모습은 그보다 190여 년 전 세종이 취했던 조치와 대조를 이룬다. 연이은 대기근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워지자 세종은 1437년 1월에 국왕 가족의 재산을 축소하라고 지시했다. “하늘의 재앙과 땅의 이변이 있고 없는 것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배포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다”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왕의 친아들과 친손자가 보유한 토지에서 받아갈 연봉[年俸=科田]을 크게 줄이라고 했다. 반대하는 신하들을 물리치고 세종은 수양대군 등 대군들의 연봉은 각각 50결씩, 부마는 30결씩 줄인 다음 아예 법제화시켰다(세종실록 19년 1월 12일).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 ‘옳은 정치[正]로 되돌려 놓는다[反]’며 정권을 잡은 인조는 불과 4년 만에 역대 최악의 군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는 숱한 재난으로 정치를 뜻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개탄했지만, 왕 자신이 사사로움에 붙잡혀 인심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그가 비록 삼대를 꿈꾸었을지 모르나 하나라의 우(禹)와 은나라의 탕(湯), 그리고 주나라의 문왕·무왕의 정치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 같다. 만약 그가 우임금처럼, 치수(治水) 사업을 위해 9년 동안이나 밖에 있으면서 자신의 집 앞을 세 번 지나갔으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책임지는 자세로 대동법과 호패법을 추진했더라면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4/04/AOBHYKZNCJCWTGVJTHWVKZHJ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