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박건형 기자
입력 2023.07.25. 03:00 업데이트 2023.07.25. 07:43
1600년대 말 윌리엄 3세 시대 영국은 위조화폐로 골머리를 앓았다. 위폐범은 물론 참여한 직공들도 손목을 잘랐지만, 돈을 만들어 돈을 벌려는 사람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유통되는 동전의 20%가 가짜인 지경이 됐다. 영국은행 창립 멤버 찰스 몬터규는 부패한 왕립 조폐국을 바꿔야 한다며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감사관으로 추천했다. 이 감사관은 집요하게 위폐범을 추적했고, 수십 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1699년 조폐국장까지 올라 25년간 화폐 개혁을 이끈 이 인물이 바로 아이작 뉴턴, 만물의 법칙을 수식으로 표현해 낸 천재였다.
뉴턴은 합리적 추론과 함정 수사, 스파이를 동원한 심리전으로 위폐 조직을 와해시켰고 조폐국 인력과 기계 수요를 계산해 재배치했다. 불량 화폐 문제도 해결했다. 금·은으로 만든 동전의 가장자리를 깎는 ‘클리핑’은 기원전 6세기 리디아 지역에서 시작돼 뉴턴 시대까지 이어졌다. 동전은 동전대로 사용하고, 깎아낸 금·은은 팔거나 동전 위조에 활용하는 식이었다. ‘악화가 양화를 사라지게 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이 바로 불량 동전이 계속 늘어나는 현상에서 비롯됐다. 뉴턴은 동전 가장자리를 톱니 모양으로 만들었고, 톱니가 사라진 화폐는 유통되지 않게 됐다. 2000년 넘은 난제(難題)에 대한 뉴턴의 답은 오늘날 동전에도 남아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100달러 지폐의 얼굴 벤저민 프랭클린도 화폐 전문가였다. 미국 노트르담대 연구진은 지난 17일 국제 학술지 미 국립과학원회보에 “프랭클린이 만든 지폐를 현미경과 레이저로 분석한 결과 시대를 앞선 인쇄와 제지, 잉크 기술을 발견했으며 위조지폐 판독에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열두 살 때부터 인쇄소에서 일한 프랭클린은 스물네 살에 인쇄소를 차렸고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정부와 4만파운드를 찍는 계약을 하면서 조폐 사업에 진출했다. 연구팀은 대학 도서관의 18세기 미국 지폐 600장을 살펴 프랭클린 지폐에서 세 가지 특별한 점을 발견했다. 우선 프랭클린은 지폐의 종이에 필라델피아 지역 광물 백운모와 파란 실을 넣었다. 연구팀은 이 반짝이는 광물이 종이 지폐의 내구성을 높이는 동시에 위폐 판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했다.
프랭클린은 또 허브의 일종인 세이지 잎을 동판으로 만들어 지폐에 인쇄했다. 혈관처럼 복잡하게 얽힌 세이지 잎 무늬는 같은 잎이 하나뿐이어서 모방이 어려웠다. 무작위 패턴으로 진품에 고유성을 부여하는 현대 기술을 이미 활용한 것이다. 잉크도 특이했다. 당시 지폐에는 기름이나 뼈를 태울 때 나오는 인과 칼슘 비율이 높은 검댕을 활용했는데 프랭클린 지폐의 잉크는 흑연이었다. 연구팀은 “역사가들은 미국에서 흑연이 인쇄에 사용된 것을 훨씬 뒤의 일로 여겼다”고 했다.
그 후로 수백 년간 희토류, 홀로그램 같은 첨단 기술이 화폐에 적용될 때마다 곧이어 모방하는 기술이 탄생했다. 2010년 이후 영국·호주 등 각국 정부는 종이 지폐 대신 위조 방지 기술을 담기 간편한 고분자(폴리머) 지폐를 도입하고 있지만 위조범들은 이마저 뛰어넘고 있다. 뉴턴의 후예들은 위폐를 뿌리 뽑을 방법을 찾고 있다. 영국 워릭대와 더럼대 공동 연구팀은 모든 폴리머 지폐가 고유 패턴을 갖고 있다고 국제전기전자공학회 학술지에 발표했다. 지폐에 불투명 코팅을 하는 과정에서 잉크가 고르게 펴지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각기 다른 지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추출된 지폐 지문 정확도는 홍채 인식보다 4배 이상 높은데, 영국에서 유통되는 지폐 40억장의 지문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용량은 1테라바이트에 불과했다. 구상이 실현되면 언젠가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위폐를 즉석에서 판독할 수도 있다.
위폐 방지 기술의 역사는 지키는 기술과 훔치는 기술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보여준다. 위폐가 없으면 위폐 방지 기술이 없고, 해커가 있어야 보안 기술이 발전한다. 돈이라는 원초적 욕망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가능케 한다. 뉴턴이 명예로운 교수 자리를 버리고 조폐국으로 간 것은 돈 때문이었다. 당시 조폐국 감사관 연봉은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네 배였다. 그런 뉴턴도 말년에 주식 버블 사건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복잡한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알 길이 없다.”
윌리엄 3세![]() |
찰스 몬터규![]() |
아이작 뉴턴![]() |
그레셤![]() |
벤저민 프랭클![]() |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7/25/INQLQK2Q3VEFDCX4QIYPQL2T5M/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엎드려 자고 욕하면 즉각 제지...뉴욕, 학생 인권만큼 책임도 묻는다 (0) | 2023.07.26 |
---|---|
“전쟁땐 가짜뉴스가 치명타...北, 대통령 도망·미군철수 퍼트릴 것” (0) | 2023.07.26 |
[만물상] 중국발 ‘브러싱 스캠’ (0) | 2023.07.25 |
[최영미의 어떤 시] [130] 호박(南瓜歎) (0) | 2023.07.24 |
[만물상] 자식 잃은 부모 (0) | 2023.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