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최영미의 어떤 시] [137] 사랑 5 -결혼식의 사랑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9.11. 03:00 업데이트 2023.09.11. 05:25

일러스트=이철원

사랑 5

-결혼식의 사랑

성체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든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김승희(1952~)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제목이 붙어있으나 실은 섬뜩하고 차가운 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정원’을 다녀온 날 밤에 김승희 시인은 이 시를 썼다. 그날 일본 정원에서는 마침 결혼식이 열리고 있었고 “그 흰 장갑에서 불현듯 차가운 파시즘의 냄새를 맡았다”고 시인은 설명한다. “케이트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을 결혼과 식민주의 담론과 연결시켜본 시. 남녀 사이의 힘의 역학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결혼식을 정치적 시선으로 분석해보고 있다.” (김승희, ‘남자들은 모른다’ 169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며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시. 1행의 ‘신부’(神父)와 4행의 ‘신부’(新婦)는 한글 발음은 같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르다.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하는 절묘한 대응도 재미있다.

김승희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남자들은 모른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9/11/M5DFH4657JCENASIBJCLBKU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