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일 기자
입력 2023.10.03. 03:18
10월2일, 어제는 ‘노인의 날’이었다. 해마다 이날이면 복지부가 그해 100세를 맞는 어르신들께 무병장수를 빌며 대통령 명의의 ‘청려장(靑藜杖)’ 지팡이를 선물해 왔다. 올해 청려장을 받은 주인공은 2623명이었다. 할머니들이 2073명으로, 남성보다 서너 곱 많다. 주민등록상으로 100세 되신 분은 물론이고, 이와 무관하게 해당 지자체에서 100세가 틀림없다고 확인한 분도 포함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그 숫자가 곱절 이상 늘었다.
▶청려장은 명아주라는 잡초로 만든다. 한해살이풀인데도 잘 말리면 줄기와 뿌리가 단단하기가 쇠지팡이 저리 가라다. 요즘이 한창 명아주를 거둬들일 때라는데, 어른 키보다 한 자 넘게 자란 명아주를 뿌리째 뽑아 다듬은 후 솥에 찌고 껍질을 벗겨 그늘에 오랫동안 말린다. 그러곤 사포질, 기름 먹이기, 옻칠 처럼 갖은 정성을 들여 가공하면 마치 옹이 진 고목으로 만든 것처럼 멋스럽게 모양새가 뒤틀린 지팡이가 된다. 망치로 부수려 해도 금도 안 갈 만큼 굳은데도 겨우 250~300g 정도라 하니 힘없는 노인도 가볍게 들 수 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작품 ‘모귀(暮歸)’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그는 ‘내일도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바라보겠네’라고 읊고 있는데, ‘청려장’에서 한자 ‘려(藜)’가 명아주란 뜻이다. 신라 시대 김유신이 나이를 핑계 삼아 은퇴하겠다고 하자 임금이 그를 말리면서 이 지팡이를 내렸다고 한다. 경북 안동에는 퇴계가 짚던 청려장 유물이 있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에서 받은 선물도 청려장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아비가 쉰 살이 되면 자식이 청려장을 바쳤는데 그것이 가장(家杖)이요, 예순이 됐을 때 마을 사람들이 선사하면 향장(鄕杖)이며, 일흔이 됐을 때 나라에서 주는 것을 국장(國杖), 여든에 왕이 하사하면 조장(朝杖)이라고 했다. 그때 청려장은 쇠약해진 몸을 의탁하라는 의미를 넘어서 집안·마을·국가를 위해 헌신해 온 생애를 공경한다는 뜻이 더 깊었을 것이다.
▶이렇듯 청려장 지팡이에는 노인의 지혜와 자존감이 공동체를 지켜내는 힘이라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최근 정치권에선 노인 공경은커녕 “살날이 짧은” 노인에게 참정권을 제한하자는 막말까지 횡행했는데, 단식 중이던 그 당 대표가 엊그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뜨악했다. 청려장 전통이 무색할 만큼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최악이다. 추석 연휴와 겹친 ‘노인의 날’을 보내면서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청려장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김광일 논설위원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10/03/WSWL5555YFALFMNEDJPEK45EU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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