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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8개 면에 쓴 키신저 부고

일러스트=이철원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3.12.04. 20:08 업데이트 2023.12.04. 23:33


한 분야를 오래 맡아 취재하다 보면 ‘이런 사람의 인생은 잘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려면 취재원에 대한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 문학을 담당하던 시절 필자는 박경리·박완서·이청준 세 작가의 부고 기사를 썼다. 인생과 작품 세계를 파악하고 작가에 대한 평론까지 대강 읽어 두었는데도 준비 부족을 절감했다.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없는 게 부고 기사다.

▶영미권 언론은 부고 기사에 각별한 정성을 쏟는 것으로 유명하다. 16세로 미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된 엘리너 스미스에 대한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는 놀랍게도 그녀가 만 20세였던 1931년에 처음 작성됐다. 스미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경우에 대비해 미리 써 뒀고, 이 글을 80년간 보관하면서 이후의 삶까지 차곡차곡 더해뒀다가 2010년 별세하자 완성된 부고 기사를 냈다. 뉴욕타임스 부고 담당 기자들의 세계를 소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오빗’에 나오는 실화다.

▶미국 외교의 거목 헨리 키신저가 지난달 29일 별세한 뒤 뉴욕타임스에 실린 부고는 이런 전통을 새삼 돌아보게 한다. 다음 날 1면 스트레이트를 포함해 3개 면에 발자취를 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글 말미에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싣겠다’고 예고했다. 다음 날 1면 포함 8개 면에 펼쳐진 부고는 키신저의 ‘미니 전기’였다. 이 중 6개 면을 30년 기자 생활을 통해 키신저를 꾸준히 만나고 취재한 외교 전문 데이비드 생어 기자가 썼다.

▶부고만 쓰는 기자를 따로 두는 곳도 많다. 부고 기사에 실리는 사연들에 대한 독자의 관심도 크다 보니 부고 전문 기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와 TV 드라마가 제작될 정도다. 부고 기사만 따로 모은 서적 출간도 활발하다.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는 정확하기도 하지만 흡인력 있는 스토리로도 유명하다. 몇 해 전엔 1851년 창간호부터 2016년까지 165년간 보도한 부고 기사를 모아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이란 책도 냈다.

▶유명인만 대상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부고 기사를 1000건 넘게 쓴 월스트리트저널의 제임스 해거티 기자는 평범한 이들의 죽음에서도 의미 있는 이야기를 발굴한다. 115세로 타계한 할머니에 대해 그가 쓴 기사 첫 문장은 ‘온갖 뉴스와 논평에 시달리는 시대에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지 않으며 TV도 거의 보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해거티는 “누구나 책 한 권만큼의 이야깃거리가 있고 어떤 인생이든 남기고 가는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이런 전통을 빚어낸다.

 

박경리
박완서
이청준
엘리너 스미
오빗
헨리 키신저
데이비드 생어
뉴욕타임스 부고모음집
제임스 해거티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12/04/D6SQHKLA4ZCFVI4YBNWT2WRJ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