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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독일, 대만식 ‘인생 진로 결정법’

김홍수 논설위원
입력 2023.12.27. 20:32 업데이트 2023.12.27. 23:29

일러스트=이철원


독일 초등학교는 4년제다. 4학년 말이 되면 담임교사가 학부모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학업 성적과 학습 태도, 성실성 등을 근거로, 대학에 갈 학생인지, 직업학교행 학생인지 통보한다. 대학 진학 코스인 김나지움엔 전체 학생의 30% 정도만 간다. 만 열 살에 인생 진로가 정해지는 셈이니 어찌 보면 잔인한 제도다. 유럽 특파원 시절 만난 독일 학부모는 “대부분 교사의 추천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지만 집에 가서 눈물을 흘리는 학부모도 간혹 있다”고 했다.

▶독일 학부모들이 자녀의 직업학교행 통보를 대부분 수용하는 이유는 독일 직업교육 제도가 워낙 믿을만하고, 기능인의 삶이 대졸자 못지않게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5~10년 실업 학교를 거친 다음, 기업과 정부가 함께 운영하는 3~4년제 전문 기술학교에 진학해 월급을 받으며 기술을 배운다. 졸업 후 기업에 취업하면 급여를 대졸자 임금의 90% 이상 받는다. 기술을 더 익혀 ‘마이스터’ 자격을 따면 대졸자 이상의 대우를 받고 직업학교 교사도 될 수 있다.

▶중세 동업자 조합인 길드(guild)의 도제식 교육법이 독일 직업교육의 뿌리라고 하는데, 아시아권에도 성공 사례가 있다. 대만에선 중학교 3학년 때 대학 진학을 위한 일반고와 직업학교(대부분 공업고) 진학으로 진로가 나뉜다. 공업고를 가면 일반 대학 진학이 안 되고, 직업훈련 기관인 과학기술대학만 진학이 가능하다. 과기대 졸업생은 TSMC 같은 대기업에서 대졸자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얼마 전 대만 여행 때 만난 현지인은 “명문고로 이름난 공업고가 많고, 그런 학교에 합격하면 마을에 플래카드가 걸린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독일 직업교육 제도를 본떠 ‘기술 명장’을 육성한다는 목표로 ‘마이스터고’를 만들었다. 전국 마이스터고 47곳의 평균 취업률이 80%에 이르는 등 취업률은 대졸자보다 훨씬 좋다. 입학 경쟁률이 3~4 대 1에 이르는 곳도 있다. 하지만 학벌 중시 문화 탓에 대만처럼 명문고 반열에 오른 학교가 나오려면 멀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이 26일 국무회의에서 “교육 등에서 과도한 경쟁이 저출생의 원인”이라고 했다. 같은 날 한국은행은 전국 제조업 공장에서 구인난이 심각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고교 졸업생 70%가 대학을 진학하는데 구직을 포기한 채 집에서 노는 청년이 68만명에 달한다.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에 돈을 쓰느라 부모들은 노후 대비를 못 해 노인 빈곤율이 세계 1위다. 독일·대만식 청소년 진로 결정 모델이 우리나라에선 정말 불가능한 걸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12/27/6ICJXMCXMZE75KCYMAR4HXSC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