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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유덕종의 아디스 레터]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오늘도 낡은 병동 지킨다

유덕종 의사
입력 2025.10.20. 23:33

폐에 혹 생긴 열아홉 소녀 예루살렘, 불치암 확인에 두 달 걸려
'한국이었다면…' 좌절감·무력감 느낄 틈 없이 새 환자에게 간다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한 병원, 나는 오늘도 낡은 진료 가운을 입고 병동으로 향한다. 며칠 전 호흡기 병동에 입원한 열아홉 살 소녀의 이름은 예루살렘이다. 베들레헴과 함께, 솔로몬의 후예를 자처하는 에티오피아에서는 아주 흔한 여자 이름 중 하나다. 호흡 곤란으로 병원에 실려 온 그녀의 방사선 사진에는 오른쪽 폐 상엽에 자그마한 혹이 있었고, 흉막과 심낭에는 이미 물이 많이 차 있었다. 증상만으로도 결핵 아니면 암일 가능성이 매우 짙었다. 스무 살을 채우지 못한 소녀는 한시라도 빨리 정확하게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하지만 아프리카의 의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의사의 사명감과 열정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다. 질병을 확진하는 데만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버렸다. 흉수를 뽑아 여러 검사를 진행했지만, 결핵인지 암인지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았다. 기관지경 검사를 했을 때, 기관지가 좁아져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점막 자체는 정상이었다. 이후 CT 유도 폐 조직 검사를 하려 했지만, 여러 이유로 계속 검사가 미뤄졌다. 기다리는 동안 호흡 곤란이 심해진 환자를 위해 흉수를 제거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수련의들의 실수로 기흉이 발생해 검사는 더욱 늦어지고 말았다.

삽관으로 가까스로 기흉을 해결한 후 영상의학과에 CT 유도 폐 조직 검사를 재차 의뢰했으나, 검사는 끝없이 미뤄졌다. 환자 가족은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워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담당 레지던트와 중재방사선과에 찾아갔고, 환자 사정을 설명하며 조속한 검사를 부탁했다. 이곳 시스템으로는 조직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만 최소 2주가 걸린다. 만약 특수 염색이 필요하다면 또 2주를 기다려야 한다. 나는 그 환자의 조직 검사 결과가 치료가 비교적 용이한 임파선암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조직 검사 결과는 치료가 매우 힘든 암으로 진단되었다. 그동안 예루살렘은 점점 더 야위어 갔고, 숨 쉬기조차 버거워 고통스러워했다.

에티오피아에서 호흡기 환자들을 진찰하는 유덕종 교수. /유덕종 제공


일주일에 두 번 하는 회진 때마다 힘겹게 숨을 쉬는 그녀를 마주하는 일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열아홉 살짜리가 병상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곁에서 함께 마음 아파하고, 산소와 진통제로 고통을 덜어주는 대증요법이 전부였다. 생기를 잃어가는 환자를 보며 가족에게 분주한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조용히 이별을 맞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 주었다.

퇴원한 지 일주일 만에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환자 보호자들이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고 레지던트가 전해 주었지만, 그 어떤 위로도 내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주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걸까? 만약 예루살렘이 한국에 있었더라면,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를 위해 한 일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끝없이 되묻게 되었다.

에티오피아의 의료 시스템은 내가 내과 레지던트로 수련을 받던 1980년대 한국에 비해서도 부족한 점이 많다. 기초적인 검사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하고 필수적인 치료 약제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탓에 환자를 진료하면서 빈번하게 무력감을 느낀다. 흔히 선진국 의사들이 봉사 활동을 하러 후진국에 가면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프리카에서 진료하다 보면 보람보다 좌절감을 느끼는 순간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도 진료에 나선다. 무력감과 좌절감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새로운 환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의대생들과 수련의들에게 “우리 환자들을 가족과 같이 진료하자”고 다독이며, 나 자신을 향한 다짐도 멈추지 않는다. 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좀 더 나은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낡은 병동을 지킨다.

☞의사 유덕종(66)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0/20/W5J76AHKHNFGXAIB2MVHMYMVF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