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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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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1(금)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균허난설헌 생가터를 다녀왔습니다..

카메라: Leica 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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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許筠·許蘭雪軒詩碑公園)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시비(詩碑)공원으로 1998년에 개관하였다.
공원은 강릉 출생의 대표적인 문인인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허씨 5문장가의 예술혼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공원 부지는 강릉시 초당동의 허균 생가 일대이며,
허엽시비, 허성시비, 허봉시비, 허균시비, 허난설헌시비 등을 세우고
시민 모두가 자연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문화산책로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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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
조선중기 문신으로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였다.
조선시대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집필하였다.
그외 작품으로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등이 있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1569년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9년(선조 22) 생원이 되고, 1594년 정시문과에 급제, 검열(檢閱)·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를 지냈다.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 이듬해 황해도도사가 되었다가 서울 기생을 끌어들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전적(典籍)·수안군수(遂安郡守)를 역임하였다.
1606년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여 명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1610년(광해군 2)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천주교 12단(端)을 얻어왔다.
같은 해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친척을 참방(參榜)했다는 탄핵을 받고 파직 후 태인(泰仁)으로 물러났다.
명나라에 여러차례 다녀오면서 수천권의 서적을 가져왔는데 이때 양명학을 접하게 되었고
특히 양명학 극좌파에 속하는 태주학파 이탁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외의 학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균은 주자학(성리학)의 허구성을 비판하였고 예학이 중심이 된 외곡된 학문을 개혁하고
민중을 위한 실용적 학문으로 조선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문학적으로도 일정한 시문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불교에도 심취하였다.
선조 대에 붕당이 형성되었을 당시 대북에 속했으며 광해군이 즉위하자
당대 권신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조정의 집권세력을 형성하였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하였으며 예조참의·호조참의·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지냈다.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얻었으며 같은 해 좌참찬(左參贊)으로 승진하였다.
3년 뒤 조카 사위인 의창군(義昌君)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역모 혐의를 받았다.
하인준(河仁俊)·김개(金闓) ·김우성(金宇成) 등과 반란을 계획하다가 탄로되어 1618년 가산이 적몰(籍沒)되고 참형되었다.
당시 세자빈이 후사가 없자 허균의 딸이 세자 후궁으로 간택되었는데 후궁이 소생을 낳게 되면
허균이 실세로 등장할 우려가 있어 모함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허균은 시문(詩文)에 뛰어난 천재로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동생이며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은 사회모순을 비판한 조선시대 대표적 걸작이다.
작품으로 《교산시화(蛟山詩話)》,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성수시화(惺叟詩話)》, 《학산초담(鶴山樵談)》,
《도문대작(屠門大爵)》, 《한년참기(旱年讖記)》, 《한정록(閑情錄)》, 《남궁선생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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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許蘭雪軒)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여류시인.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다.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고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蘭雪軒).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명종 18년(1563년) 강릉(江陵) 에서 출생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의 누나이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 15세의 나이에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오빠 허봉이 귀양을 가는 등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선조 22년(1589년) 27세로 요절하였으며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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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 옆 생가터 입구 도로

허균허난설헌생가터.. 입장료는 없습니다..

 

지난 겨울 폭설로 기와가 많이 상했습니다..

 

 

 

▽ 허난설헌

 

 

 

 

허균허난설헌시비공원.. 소아무와 벚나무가 많습니다..

 

 

 

 

 

 

 

 

 

 

허균허난설헌 생가터 위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