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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여행의 이유 - 잠깐의 완벽한 자유 - 류진창

 여행의 이유
제대로 떠나본 사람만이 찾을 수 있는 것들

 


저자: HK여행작가아카데미 지음
출판: 티핑포인트 | 2016.06.30
형태: 판형 규격外 |  페이지 수 408  | ISBN
정가: 15,000원 13,500원 다음쇼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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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완벽한 자유

류진창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난다.

팍팍한 일상을 탈출해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다.
그런데 과연 여행지에서 나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다 잊기 위해 떠나왔는데 다 잊을 수 있을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잊었던 고민과 번뇌는 금방 모습을 드러낸다.
잠깐이나마 이런 잊음을 즐기기 위해 마약처럼 계속 여행을 다니는 게 아닐까?
난 여행을 떠난다.

완벽한 자유를 만날지도 모르니까.

 

협재
결혼 첫해 제주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아내는 임신 5개월, 한참 힘들 때였다.
캠핑 장비를 준비해서 협재에 텐트를 쳤다.
지척에 비양도가 떠있고 파란색 바다와 산호빛 백사장은 눈부셨다.
산들산들 바닷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찰랑거리는 바닷물, 발가락 사이를 흐르는 고운 모래가 간지러웠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이 순간, 천국이 따로 없었다.
금방 할 일이 없어졌다.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지 못하고 뭔가 할 거리를 찾아야 했다.
1박2일 일정으로 마라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하루 밤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텐트는 그대로 두고 카메라와 지갑 등 귀중품만 챙겼다.

 

마라도
모슬포에서 마라도를 가는 여객선이 하루에 한 편 있었다.

가파도를 잠깐 들렀다가 마라도에 도착했다.
마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는 섬으로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11킬로미터 해상에 있다.
면적 0.3제곱킬로미터, 해안선길이 4.2킬로미터, 최고점 39미터이며 100여명의 주민이 산다.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리 내외, 동네 주민, 관광객, 낚시꾼 등 다해서 열댓 명이 마라도에 상륙했다.
하루에 배가 한 편밖에 없어 마라도를 방문하는 사람은 무조건 일박을 해야 했다.
여관이 한 개 있어 하루 묵는 것으로 방을 잡았다.

식사도 제공된다 하니 한시름 놓았다.
섬 중앙에 마라분교가, 옆에 조그마한 저수지도 있었다.
마라도교회, 마라도등대, 국토최남단비 등을 구경하며 섬을 한바퀴 도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섬 어느 곳에도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여름 섬은 시원할거라 생각했는데 정 반대였다.
찌는 듯 날씨가 더웠고 한두 시간 지나자 빨리 섬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다에서 해가 뜨고 바다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 마라도라 했다.
환상적인 일몰을 구경했다. 밤에는 무수히 많은 별들도 구경했다.

 

태풍
용왕님이 우리 부부를 시샘했나 보다.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태풍경보가 발령되면 보통 3일간 배가 뜨지 않는다.
태풍 도착 하루 전에는 높은 파도 때문에, 태풍이 지나가는 날은 비바람 때문에, 다음에는 너울 파도 때문에 출항이 금지된다.
3일 간 더 마라도에 있어야 했다.

태풍이 지나간 하루 말고는 내내 하늘이 가을처럼 높고 청명했다.
한라산과 산방산이 코 앞에 있는 듯 가까웠지만 하얀 포말을 만드는 검푸른 바다는 우리를 가로막았다.
협재에 둔 텐트와 짐이 걱정됐지만 파도가 잔잔해지길 기다리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이 와중에도 낚시꾼들은 신이 났다.

틈만 나면 바닷가에 나가 낚시를 했다.
낚시가 잘 되지 않으면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작살로 물고기를 잡았다.
날이 저물면 잡아온 물고기를 횟감으로 만들어 여관  평상에 둘러앉아 소주와 함께 먹었다.

 

좌절
이틀 째 되던 날, 낚시꾼들이 마라도 탈출을 시도했다.
본토와 연락해서 어선 한 척을 불렀다.

큰 항구에는 어선 출항을 통제하므로 작은 포구에서 몰래 나와 이곳으로 온 듯 했다.
엄청난 파도가 방파제와 배를 때리는데도 이들은 몸을 날리다시피 어선으로 옮겨 탔다.
집사람은 같이 묻어 나가자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루 일찍 나가려고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어선은 일엽편주(一葉片舟)였다.
파도에 파묻혀 선체가 보이지 않았다가 금방 솟아 오르는 모습이 반복됐다.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는 낚시꾼들은 이렇게 탈출에 성공했다.
낚시꾼들이 섬을 빠져 나가자 마라도는 더 조용해졌다.
파도 소리 외에는 정적(靜寂)이 감돌았다.
책이라도 가지고 왔으면 독서라도 하겠는데, 여관 방에은 흔한 TV도 하나 없고,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라 훅하고 습도도 높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비오 듯 해 낮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어슬렁거리다 마라분교에 갔다.
방학이라 학생은 없었고 급사(給仕)가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더위에 지친 우리를 보고 안쓰러웠는지 두레박을 건네며 우물에 가서 등물을 치라 했다.
마라도에 우물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자 손짓으로 위치를 대충 알려줬다.

 

자유
마라도 북쪽 사면은 완만하고 뻥 뚫려 있었다.
세찬 바람 때문인지 잔디 외에는 보이는 식물이 없었다.
넓은 초원 사이로 돌무덤이 몇 있고 바다 건너 한라산과 산방산이 선명했다.
우물은 마을을 벗어난 북쪽 언덕 아래 격리된 곳에 있었다.
돌과 콘크리트로 만든 적당한 높이의 턱 위에 작은 입구가 있고 안은 넓고 수량(水量)이 풍부했다.
빛이 도달하지 않는 곳은 검회색을 띄고 있어 약간 으시시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군용(軍用)으로 만든 오래된 우물이라 했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마셔봤다.

얼음장같이 차고 시원했다.
아내에게 마을 방향으로 망보라 하고 내가 먼저 씻기로 했다.
옷을 홀라당 벗었다.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올리기를 여러 번, 머리서부터 온 몸에 물을 쏟아 부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시원했다.

더위에 지친 몸이 생기를 찾았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내 몸과 마음을 생명수로 채우고 또 채웠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사방으로 뻥 뚫린 초원 한 가운데 서서 이렇게 알몸 샤워를 했다.
잠깐이었지만 완벽한 자유를 누렸다.

 

악몽
다음 날 파도가 잔잔해져 마라도를 나왔다.
협재에 가보니 빈 텐트와 빈 배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가지, 버너, 코펠, 식자재 등 모든 것이 없어졌다.
좀도둑이 우리 텐트를 아지트 삼은 듯, 처음 보는 생감자 한개와 타다 남은 양초 한개를 남긴 채 다 가지고 갔다.
아내는 ‘내가 두 번 다시 섬 여행을 오나 봐라’ 하면서 엉엉 울었다.
최악의 악몽(惡夢)이라 했다.

누구에게는 악몽이요 누구에게는 최고가 될 수 있겠다.
마라도에서 느꼈던 자유감(自由感)은 최고의 기억으로 남았다.
사는 곳에서 멀어지거나 교통이 불편한 곳에 갈수록, 특히 섬여행을 할 때 이 느낌은 더 강해졌다.
마약처럼 끈질기고 유혹적이라 여행 계획을 짤 때면 변함없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작년에는 홍도~흑산도~가거도~만재도 섬 트레킹을 다녀왔다.
날씨가 궂어지면 발이 묶일 수도 있었지만 자유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려움을 극복했다.

 

악연?
마라도 여행 26년 후 작년 가을, 아내는 친구 몇하고 2박3일 일정으로 울릉도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날씨가 나빠져 제때 못나오고 사흘 더 있었다.
아내와 섬 사이에 놓인 악연(惡緣)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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