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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비경999

(한국의비경070)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인정전 야경

아래 사진은 토픽이미지 계약 작가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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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국보225호),창덕궁,종로구,서울(2010)
artist:  S.K. Kim
ⓒ792534/Topicimages(토픽이미지)
http://www.topic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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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은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
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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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殿)은
태종 이방원이 거처할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건립하면서 1405년에 완공되었다.
태종 때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으나 1418년에 규모가 큰 건물로 고쳐지었다.
인정전(仁政殿)은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창덕궁의 정전(政殿)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재로 전소되었고 선조 때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던 1607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인정전은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행하였고 조선왕조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하지만 창덕궁은 여러차례 화재로 시달렸는데 1803년 선정전에서 불이나 인정전까지 전소되고 말았다.
이듬해 1804년(순조 4)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의 앞 마당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품계석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인정문과 함께 회랑으로 둘러싸여 일곽을 형성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重層) 팔작지붕 다포(多包)집이며 순조 때 용마루에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배꽃문양 다섯개를 새겼다.
기단(基壇)은 2중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과 좌우 측면에 석계(石階)를 설치하고 바닥면에는 전석(塼石)을 깔았다.
상하층으로 된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고 상하층 월대에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돌계단 난간에는 8마리의 석수(石獸)를 새겼고, 가운데 계단에는 답도(踏道)를 설치하여 봉황을 새겼다.
기둥은 배흘림이 없는 원주(圓柱)이고,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과 4개의 우고주(隅高柱)를 세워 중층가구법(重層架構法)을 따랐다.
두공(枓栱)은 밖이 3출목(三出目)이고 안이 4출목인 다출목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둥머리의 안초공(按草工)으로부터 살미와 첨차(檐  遮)의 세부수법이 조선 말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가구(架構)는 외중층(外重層) 내통층(內通層) 수법이고, 고주(高柱) 몸에 퇴량(退樑)을 끼워서
2층평주(二層平柱)를 받게 하였으며 우고주(隅高柱)가 2층 우주가 되게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인데 각 마루에는 양성(兩城)하여 취두(鷲頭)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올려 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이 건물은 가구의 짜임새와 외관이 견실하면서 운치와 미려를 겸하여
흥선대원군이 근정전(勤政殿)을 재건할 때 이 건물을 규범으로 하였다.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출처:네이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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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홈: http://www.cd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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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인정전 위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