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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영 News English

[윤희영의 News English] 독립운동가의 손자 : Grandson of an independence activist

진창의 영어공부 0379

입력 2011.03.30 23:10 | 수정 2011.04.14 09:57


조용필은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go away like a morning dew)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leave a trace of my life)"라고 했다.

"한 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vanish away like a wisp of smoke)…. 묻지 마라 왜냐고…."

미국에 사는 조지 남궁(68)씨는 어린이를 위한 구호활동(famine relief activities) 재단 'Kids of Kilimanjaro'를 운영 중이다.

아프리카의 1만3000명 학생들에게 매일 점심을 제공하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삶(a life of vicissitudes)이 그를 킬리만자로로 이끌었다.

 

 

남궁씨는 194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상하이한국 망명정부에 합류(join the Korean government-in-exile)했을 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to help feed the starving)

매일 대문 근처에 쌀이 담긴 양동이 하나를 놓아두었다(keep a bucket of rice near the front door).

1949년 공산당 승리로 내전이 끝나면서 중국은 혼돈상태에 빠졌다(sink to a state of chaos).

가족들은 홍콩으로 도피(flee on for Hong Kong)했다.

3년 뒤 다시 일본행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hop a freighter to Japan). 중

공군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be widely rumored).

영어를 쓰는 '조센진' 아이는 일본에서 숱한 고난과 차별을 겪어야(go through lots of hardships and discriminations) 했다.

그러나 꿋꿋이 버텨낸(take a firm stand) 그는 대학 졸업 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살아남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work day and night).

초주검이 돼(be all but dead) 병원 신세를 진(end up in the hospital)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마케팅회사와 판촉용 장난감(promo toys) 생산업체를 차려 많은 돈을 벌었다(rake in the money).

캘리포니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an aristocrat of wealth)가 됐다.

킬리만자로재단을 설립한 것은 6년 전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굶주리는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a sorry sight of starving children)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맨손으로 큰 재산을 모은(make a fortune starting from scratch) 독립운동가의 손자가

기아로부터의 해방(the freedom from famine)을 위해 여생을 바치도록(devote the rest of h is life) 한 것은

60여년 전 부모님이 대문 앞에 놓아두셨던 쌀 양동이에 대한 기억이었다.

출처 :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30/20110330026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