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19.05.02 03:13
한국 어버이날 기원 된 美 어머니날, 어머니 모시고 브런치 먹는 전통
하루만이라도 '가사 해방' 의도… 여성해방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올 어버이날은 평일인 수요일이라 부모님 모시고 저녁 식사하는 가정이 많을 듯하다. 어머니날이 매년 5월 둘째 주 일요일인 미국에서는 이날 브런치(brunch·아침 겸 점심)를 먹는 전통이 있다. 브런치가 젊은 여성들의 주말 외식 문화로 알려진 한국에서 보기엔 의아하지만, 어머니날과 브런치는 의외로 길고 깊은 인연이 있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어머니(어버이)날을 기념하게 된 건 미국의 영향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3년 뒤인 1868년 앤 자비스(Jarvis)라는 여성은 전쟁에서 자식이 죽거나 다친 어머니들이 서로 위로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자비스의 딸 애나는 어머니의 업적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1905년 5월 9일 '어머니를 기억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모임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14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사한 아들을 둔 어머니를 기리는 날을 정하겠다고 선언했고, 마침내 193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어머니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이후 일본, 중국, 벨기에, 쿠바, 독일, 핀란드, 케냐, 페루, 우간다 등 80개가 넘는 나라에서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다. 한국은 1956년 어머니날을 만들었다가 1973년 어버이날로 바꿨다.
브런치가 등장한 건 어머니날과 비슷한 1900년대 초반이다. 브런치를 언제부터 먹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브런치라는 단어가 등장한 연도는 1895년으로 명확하다. 영국의 유명한 주당(酒黨)이자 작가였던 가이 베린저(Beringer)가 1895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일요일 아침과 점심을 합쳐 느지막이 먹으면 늦잠 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끼를 준비하는 수고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베린저는 아침 식사에 가까운 이른 오전에 먹으면 '브런치(brunch)', 늦은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먹을 경우 '블런치(blunch)'라고 부르자 제안했다.
브런치는 곧 어머니날을 기념하는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당시만 해도 하루 세 끼 식사는 당연히 가정주부, 즉 어머니가 준비했다. 하루만이라도 집안일에서 해방시켜 드리고자 가족들이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식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브런치를 하면 한 끼라도 덜 준비할 수 있었다. 곧 '브런치=어머니날'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았다. 브런치의 확산은 여성운동과도 연관 있다. 20세기 초만 해도 서양에서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 없이 외출하거나 집 밖에서 식사하지 못했다. 본인은 물론, 가문의 명예에 먹칠한다며 엄격하게 금지됐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브런치는 '여성해방'으로 여겨졌다. 브런치 역사에 관한 책을 쓴 미국 르모인대학 파르하 테르니카르(Ternikar) 교수는 "당시 미국 가정주부는 평균적으로 하루 2시간(현재는 일주일 5시간)을 요리와 청소에 바쳤다"며 "브런치를 하면 한 끼 덜 준비해도 돼 당시 여성의 가사 부담을 크게 줄였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브런치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상징하기도 했다. 레스토랑에서 주말 브런치를 즐기는 여성들은 주중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직장생활로 주중 사교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 대신 금전적 여유가 생긴 여성들이 주말 브런치 모임을 즐겼다. 이는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뉴욕의 전문직 여성들이 주말에 브런치 모임을 갖는 모습으로 정형화됐다. 이것이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전 세계로 퍼졌고, 오늘날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브런치 문화로 확산되고 굳어졌다.
올 어버이날에는 당일 저녁 식사
대신 며칠 앞당기거나 미뤄서 주말 브런치에 부모님을 모셔볼까. 아버지들은 그리 반기지 않겠지만. '어머니날의 어머니' 자비스도 브런치가 탐탁잖을 것이다. 자비스는 카네이션 품귀 현상이 일어나는 등 어머니날이 상업화되자 슬퍼하다 못해 분노했다. 그리하여 죽는 날까지 어머니날 폐지 운동에 전념했다 한다. 참고로 카네이션은 애나의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꽃이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01/2019050103037.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에 붕대 감고 세상을 '앓던' 조만식 선생 (0) | 2019.05.04 |
---|---|
숭실대·한동대 "성소수자 행사 안돼"...인권위 권고도 불수용 (0) | 2019.05.03 |
[팀 알퍼의 한국 일기] 아기 상어와 텔레토비… 어른을 미소 짓게 하는 '긍정'의 힘 (0) | 2019.04.30 |
100년을 살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0) | 2019.04.27 |
[판결 디테일] 외제차 리스료 대납받은 교수에…법원따라 ‘같은 듯 다른’ 판단 (0) | 2019.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