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4.06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지난 주말에는 경남 지역 교육 연수원 요청으로 강연을 다녀왔다. 강연을 마치고 강당 밖으로 나올 때였다. 젊어 보이는 한 수강생이 인사하면서 "혹시 H 선생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물었다. "기억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을 것 같은데요?" 했더니 "제 할아버지십니다. 살아계실 때 선생님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하는 것이다. 내가 "그러면 아버지 되시는 분은 의사세요?"라고 물었다. "네. 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을 모시고 식사도 같이 하셨다고 지난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며 반가워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악수를 나누고 강연 장소를 떠났다.
옛날 일이 생각났다. 내가 중·고등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였다. 학년 말이 가까워졌을 때 교장이 나를 찾았다. H 선생이 우리 학교의 눈높이에는 맞지 않으니까, 이번 학기로 끝을 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는 얘기였다. 나도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수긍은 했으나 H 선생을 위해서는 좀 더 고려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학기만 더 여유를 갖자고 청했다. 나는 H 선생을 찾아 그 사정을 솔직히 설명하고 한 학기 동안 함께 최선을 다해 본 후에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H 선생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러나 사적인 판단보다는 학교와 학생들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 더 중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한 학기가 지났다. 내가 H 선생에게 그 문제를 상의해 보자고 했다. H 선생은 좀 시간 여유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1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선생이 아내와 같이 찾아왔다. 그동안 여러 생각을 정리했던 모양이다.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보았는데 교장 선생님 판단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지방 학교에 있다가 서울의 명문 학교로 오려던 게 제 욕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교장 선생과 상의하셔서 저를 적당한 지방 학교로 전근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시면 그 은혜는 오래 잊지 않겠습니다." 교장과 나도 그 길이 좋겠다고 합의를 보았다. H 선생을 보내고 1년쯤 후에 나도 연세대학교로 일터를 옮겼다. 그런데도 H 선생은 나를 고마운 은인같이 대해주곤 했다. 사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배려가 H 선생 3대가 나를 기억하게 만든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면, 포도밭 주인이 아침 9시, 낮 12시, 저녁 5시에 와서 일해 준 품꾼들에게 다 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비유가 있다. 영국
의 존 러스킨(1819~1900)은 그 글을 읽고 산업혁명 이후 경제적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정의로운 노사 관계보다 사랑이 있는 질서가 더 중하다는 저서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를 남겼다. 그 책을 읽은 인도의 간디도 그것이 인간 본연의 공존 가치이며 희망이라고 뒤따랐다. 정의를 완성시키는 길은 사랑이다. 인간애가 정의보다 귀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4/05/20190405018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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