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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나보고 선임하겠다"... 변호사 상대 '접견피싱' 주의보

박현익 기자

입력 2019.03.23 14:16 | 수정 2019.03.23 16:42

 

시간제약 없는 접견, 외박·외출처럼 휴식 시간
수감자들 변호사 기만해도 책임 물을 방법 없어

"제 아들이 지금 수감돼 있어서요... 꼭 선임할테니 접견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직접 변호사님 찾아뵙고 싶은데 몸이 안 좋아서..."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김모 변호사는 지난달 모르는 번호로 이런 연락을 받았다. 중년 여성은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수감자 이모씨의 어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내 아들이 진행 중인 사건과 구치소에 함께 수감된 아들 동료의 사건도 맡기고 싶다""동료 수감자도 같이 만나 달라"고 했다김 변호사는 좋은 기회다 싶어 바로 다음날 시간을 내서 이씨가 수감돼 있는 구치소를 찾아갔다. 그런데 막상 찾아가니 이씨는 사건과 상관없는 잡담만 늘어놨고, 함께 나온 동료 수감자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더니 이씨는 접견이 끝날 때쯤 "좀 더 고민해보겠다. 다음에 한 번 더 접견 와 달라"고 했다. 이상하다 싶었던 김 변호사는 동료 변호사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놨다가 뒤늦게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 구치소 수감자들이 사건 수임계약을 미끼로 공짜 변호사 접견을 노리는 속칭 접견 피싱(낚시)이 유행하고 있다.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주의보가 내려진 상태다.

 

접견 피싱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안모 변호사는 "작년 말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내게 전화를 걸어 사건을 맡기고 싶다며 자기 친형을 접견해 달라고 했다""그래서 매주 구치소에 찾아가 형이라는 사람을 다섯 차례나 만났는데 결국 수임을 못하고 손을 뗐다"고 말했다. 최모 변호사는 "나도 수감자의 어머니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접견을 부탁받았다""그러나 수임을 해야지만 접견이 가능하다고 하니 그 이후로 연락이 뚝 끊겼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도 일단 접견부터 하자는 연락을 받은 변호사들이 수두룩하다""대부분 수임을 먼저 하거나 접견비를 줘야 간다며 거절하지만, 10명 중 한 두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갔다가 당하는 것 같다. 이게 모두 변호사 업계가 불황이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변호사 접견은 하루 한 번 10분만 할 수 있는 일반 접견과 달리 평일 기준으로 녹음과 횟수 제한 없이 칸막이 없는 장소에서 오전 930분부터 오후 530분 사이 무한정 가능하다. 이렇다보니 수감자들에게 변호사 접견은 군인들의 외박이나 외출처럼 특별한 휴식 시간인 셈이다. 접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변호사 접견은 군대로 치면 면회 나가는 기분 아니겠느냐""구치소 안에서는 수감자들끼리 1주일에 몇 번 접견 하는 것 가지고 서열 비슷하게 위치가 달라진다고 하더라"고 말했다보통 수감자들의 경우 보석이나 가석방을 노리거나 자신의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줄 변호사를 찾기 위해 구치소에서 접견 상담을 받는다. 접견을 해보고 나서 실제 수임을 할지, 말지 선택하는 일종의 면접인 셈이다. 다만 수감자가 변호사를 부를 때는 중간에 지인이 소개를 하거나 다른 변호사가 끼어 중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한다. 접견 피싱처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불쑥 접근해와서 수임할 것처럼 한 뒤 접견을 요청하는 경우는 의심부터 해봐야 한다고 변호사들은 말한다. 변호사들은 심할 경우 접견할 때까지 매일 같이 연락을 받는다고 한다. 오모 변호사는 "접견비를 줘야 간다고 했더니 다음날 사무실로 전화가 왔고, 사무실 직원이 같은 답변을 하니 또 얼마 안 지나 수감자 본인이 쓴 손 편지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동료 변호사는 거의 매주 한 번씩 연락을 받다가 이후 사무실을 옮겼는데, 연락 하는 사람이 용케 달라진 연락처까지 알아내 피싱 접견을 시도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한 관계자는 "수감자들끼리 서로 자신의 변호사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구치소에서 접견만 하는 변호사가 브로커처럼 다른 변호사 연락처를 슬쩍 알려주기도 한다""특히 접견 피싱은 구치소 주변에 변호사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서울 동부구치소에서 빈번히 시도되고, 여성 변호사들이 주 타깃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이 같이 재판과 상관 없이 변호사를 속이고 접견을 하는 것은 좀 더 편한 구치소 생활을 하려는 심리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채모 변호사는 "접견을 이유로 바깥에 나가면 일종의 외출을 하는 기분일 것"이라며 "답답한 감옥 안보다 더 편하기도 하고 접견실에는 수용실과 달리 냉·난방 시설도 있다"고 했다. 또 채 변호사는 "수용자들간의 만남의 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예컨대 변호사가 4시 접견을 신청해 주면 수감자는 그 전부터 나와있는데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접견을 기다리는 수용자들과 대화를 한다"고 했다.

수감자들이 변호사들을 기만해도 직접적으로 책임을 물을 방법은 없다. 재산상 이득을 취한 사기 범죄가 아닐 뿐더러 추궁해도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변호사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아니냐"며 발뺌하기 때문이다. 이모 변호사는 "막상 딱 잘라서 순수한 접견이냐, 아니냐를 따지려들면 애매해진다""수임 또는 접견비 조건 없이는 안 가는 등 당하는 쪽에서 조심해야지 별 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부 젊은 변호사들을 중심으 로 "협회 차원에서 대응을 해야 한다", "구치소 측에 정식으로 항의하자" 등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아직 실제 움직임은 없다. 구치소 관계자는 "변호사와 수감자 사이에 무슨 대화내용이 오고간지는 우리가 직접 확인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며 "설령 부적절한 목적으로 변호사를 불렀다 해도 구치소에서 직접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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