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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해현의 문학산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탐독하는 행복한 소수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9.03.21 03:12


프루스트가 문학상 탄 지 100만연체 글에 독자는 迷路를 헤매
일상의 추억이 주는 행복으로 삶의 고양 느끼는 '프루스트 효과'
여기 매료된 독자는 어디서나 少數군중에 휩쓸리지 않는 소설 애호가


올해는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가 공쿠르 문학상을 탄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수상작은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였다. 모두 7권으로 완간된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2권에 해당한다. 프랑스에선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하는 학술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나'라고 하는 남자가 추억의 갈피를 헤집어 회상을 거듭하는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해, 화자 '나'가 '오랜 시간'을 되돌아보는데, 독자는 그 오랜 시간을 인내하기 어렵다. 작가가 만연체로 거듭 이야기의 샛길로 빠지기 때문에, 독자는 자칫 글의 미로에서 헤매기 쉽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하는 식이다. 전문 연구자가 아니고선 한 군데 붙박혀 전 7권을 읽을 시간을 선뜻 내기 어렵다. 오죽했으면 "이 소설을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고 작가의 동생이 말했겠는가.

그러나 세계적으로 '프루스트 효과'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래됐다. 소설의 화자 '나'가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녹여 먹다가 어린 시절에 먹었던 똑같은 맛을 불현듯 떠올리면서 강렬한 기쁨에 사로잡힌다. 이 대목을 가리켜 일상의 추억이 주는 행복으로 인해 삶의 고양(高揚)을 느끼는 심리 상태로 '프루스트 효과'라고 한다. 또한 국내에선 프루스트 해설서가 여러 권 나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굳이 완독하지 않더라도 소설 핵심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구나 일본 영화 '러브 레터'에서 애틋한 사랑의 고리로 언급된 뒤 더 유명해졌다.



최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 4권 '소돔과 고모라' 번역본이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프루스트 연구로 프랑스 3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희영 한국외국어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옮겼다. 지난 2012년 이 소설의 첫 권 '스완네 집 쪽으로'을 번역한 뒤 진행해 온 완역 작업이 '반 고비 나그네 길'을 통과했다. 고령이 된 프랑스의 스승에게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 번역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 교수는 2021년까지 완역할 계획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지난 1985년 이미 우리말로 완역된 적이 있다. 한국 불문학계의 제1 세대인 김창석 시인(1923~2013)이 홀로 이 방대한 작업에 도전해 투병의 고초까지 겪은 뒤 결실을 보았다. 김 시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긴 하지만 때때로 시인답게 원문에서 벗어나 임의로 도치하거나 생략법을 구사하기도 했다. 외국 문학 번역은 세대에 따라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김 시인의 번역은 프랑스에서 1954년 출간된 프루스트의 소설을 옮긴 것인데, 김희영 교수의 번역은 1987년 프랑스에서 재검증을 거쳐 낸 새 판본을 텍스트로 삼았다. 일본에서도 이 판본으로 새 번역에 들어갔다고 한다. 김 교수의 번역은 원문 문체를 유려하게 살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김 교수는 완역하기 전까진 기자를 직접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메일로 번역 원칙을 물었더니 '직역 위주 번역, 원문 형식과 순서 존중, 가독성을 높이기 위한 주석 확대'를 꼽았다. 김 교수는 "외국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낯섦성'에 대한 체험으로, 지나치게 친숙한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은 외국 작품이 갖는 이타성(異他性) 체험을 방해한다"고 밝혔다.

기존 번역본과는 달리 작품 이해에 결정적인 각주(脚注)도 김 교수 번역본의 장점이다.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풍경화 '델프트 풍경'이 소설에서 간단하게 언급되는데, 김 교수는 그 그림이 작가의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작품 이해에 중요한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 김 교수 번역본은 원본의 각 권을 두 권으로 쪼갰기 때문에 지금껏 8권으로 짜였는데, 모두 13만부가량 찍었다고 한다. '프루스트 효과'에 매혹된 열성 독자가 어느 나라에서나 다중(多衆)은 아니다. 그 독자들은 소설가 스탕달이 진정한 소설 애호가를 두고 말한 '행복한 소수(少數)'라고 할 수 있다. 군중에 휩쓸리지 않고 남다른 독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진저.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0/20190320040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