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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아무튼, 주말] 30년 단골 이발사가 세상을 떠났다… 고마운 사람들, 아름다운 세상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1.19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아침식사를 끝내고 2층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본다. 히말라야를 상징하는 순백의 영봉(靈峯)이 아침 햇볕을 받아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 보인다. 네팔에 한 번은 가보고 싶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박흥식 사진작가가 전시했던 작품을 보내준 것이다. 최근에는 백세를 헤아리는 나이 때문일까, 여러 사람이 내 기호에 맞는 선물들을 보내준다. 구름 사진과 책들, 도자기들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생각을 더듬어 본다.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음식물도 그렇다. 어느 것 하나도 내가 만든 것이 없다. 오늘 마시는 이 커피도 에티오피아 농민들의 작품이다. 식당에 가서 원산지 표시를 보면 베트남이나 노르웨이에서 수입해 들여온 해산물이 있다. 우리 농산물도 수많은 사람의 정성과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신발도 바다 건너 먼 외국에서 만들어 보내준 소재들이다.

내 신체의 어느 부분을 도와준 이들도 있다. 30여 년 동안 내 머리를 다듬어 준 이발사 아저씨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에 갔을 때 "며칠 후에 폐업하기로 했습니다. 더 오래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면서 서운해했다. 지난달까지 나는 치과 치료를 받았다. 잘 아는 제자 의사다. 그는 "조금 따끔할 테니까 참아주세요"라면서 돌보아 주었다. 지금까지도 그랬으나 앞으로는 더 많은 의사나 간호사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내 학문과 지식도 2000년에 걸친 선학(先學)들이 있었고 직접 가르쳐 준 스승들과 동학들이 있었다. 사랑을 나눈 제자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과 학문만이 아니다.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 삶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 모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 대신 나는 무엇을 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가 전부였다. 지난 99년을 이웃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아왔는데 나는 한 가지밖에 하지 못했다. 그 한 책임을 잘 감당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과 뜻을 전해온다.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인가.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섬기고 싶다.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겠다. 지금의 나이가 되어 깨닫 는 바가 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 그대로이다. 하지만 더불어 산 것은 행복을 남겼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니까.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푼 사랑은 남아서 역사의 공간을 채워준다.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감사의 뜻을 나누며 사랑을 베푸는 일이다.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인생의 행복한 의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18/20190118013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