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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해현의 문학산책] 師弟간의 친밀감은 비가 나무 적시듯 스며든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8.12.13 03:12


올해 팔순 맞은 정현종 시인, 제자 문인들과 함께 보길도 찾아 윤선도의 풍류·문학 음미
제자를 환대하며 기른 스승과 평생 따르는 제자들의 交遊

정현종 시인이 최근 팔순(八旬)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2박 3일 남도 여행을 다녀왔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시(詩) '방문객'으로 이름 높은 정 시인은 숱한 제자들을 환대해 길러냈다. 1982~2005년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그는 창작 강의를 통해 여러 문인을 배출했다. 그가 강의 시간에 작품 발표를 시킨 학생들이 대부분 등단했다는 전설도 남겼다. 소설가 성석제와 황경신 외에 시인 원재길·나희덕·김응교, 평론가 이영준·최현식·유성호 등이 활동 중이다. 1989년 요절한 시인 기형도도 그의 애제자(愛弟子)였다. 정 시인은 정년 퇴임한 뒤에도 제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3년 전인 2015년에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신작 시집과 산문집을 동시에 내곤 문단과 학계에서 활동 중인 제자 20여 명을 그 당시 단골 식당으로 초대했다. 시인은 "뭐 거창하게 기념식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밥 한 끼 사주고 싶어서 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일일이 서명(署名)을 한 책을 제자들에게 나눠줬다. 제자들은 스승의 시력(詩歷) 50주년을 기리면서 장미 50송이를 바쳤다. 그날 시인은 '한없이 맑은 친밀감-사제지간(師弟之間)을 기리는 노래'란 시를 낭독했다. '거기 어리는 친밀감은/ 가령 가족 같은 것의 닫힌 본능에서 오는/ 친밀감과 다르고/ 또 가령 연애처럼 배타적인 친밀감도 아니고/ 이상(理想)과 달리 균열이 생기는/ 우정의 친밀감도 아니며/ 말하자면/ 한없이 맑은 친밀감―'.

정 시인의 최근 팔순 기념 잔치는 전남 목포·해남·보길도·증도 여행으로 꾸며졌다. 소설가 성석제가 제안한 코스였는데, 소설가 황경신이 동행했다.


정 시인은 "지난 칠순 때도 제자들과 여행을 한 적이 있다"며 "이번엔 성석제가 '보길도는 다녀오셨는가요'라고 묻기에 '안 가봤다'고 했더니 결국 보길도에 가게 됐다"며 웃었다. 보길도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지은 윤선도가 정원을 꾸미고 살던 곳이다. 성석제는 문화유산채널이 제작해 올해 휴스턴 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은 다큐 '자연과 철학을 담은 한국의 정원'에 진행자로 출연한 바 있기에 스승에게 보길도행을 권했다고 한다. 스승과 제자는 윤선도가 조성한 정원 원림(園林)을 둘러봤다. 제자는 세연정(洗然亭) 앞 연못에 윤선도가 갖다 놓은 바위들을 가리켜 "바위의 배치가 남다른 미학을 보여준다"고 감탄했다. 스승은 "윤, 선~도 이름에 '유포니(euphony·듣기 좋은 음조)가 있으니, 이렇게 살았겠지"라며 정원을 음미했다.

여행은 전복에서 젓갈까지 다양한 맛집 탐방이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미각의 실체 논쟁'이 벌어졌다. 음식 산문집도 낸 성석제가 "사실 난 음식의 맛을 모르는 미맹(味盲)이야. 색맹(色盲)처럼"이라고 고백한 뒤 "따지고 보면 미각의 실체가 없다는 이론도 있다"고 했다. 그는 "미각은 청각·후각·시각 등 다른 요인들과 함께 복합적으로 생기는 것이므로,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고, 착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현종은 "미맹이라니, 행복의 여러 요인 중 하나를 누리지 못하는구나"라며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식탁을 가리키며 "지금 우리가 먹는 것은 그리 복합적인 게 아니다"라며 "우리가 미각을 즐기는 '현상'이 있는데 미각의 실체를 따질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제자는 짐짓 대드는 척하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신경학자가 연구한 결과"라며 '권위에 의존한 논증'을 시도했다. 스승은 긴말 없이 "그 학자는 '실체 지상주의자'로구먼"이라며 멀리하려 했다. 곁에 있던 소설가 황경신이 스승의 편을 들면서 논쟁은 끝났다. 그녀는 "선생님과 연세문학회가 여행을 갔을 때 제게 육포를 주셨는데, 그때 태어나 처음으로 먹어본 그 육포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정현종의 시 ' 품'을 떠올리게 한 식탁 대화였다. '비 맞고 서 있는 나무들처럼/ 어디/ 안길 수 있을까'라며 시작한 시는 '그들이 만드는 품은 또/ 어디 있을까'라고 노래했다. 내리는 '비'와 젖는 '나무' 사이에 형성된 '틈'이 따뜻한 '품'으로 전환되듯, 스승과 제자 사이에 넉넉한 '품'이 황홀하게 피어난 가운데 보길도의 밤바다는 달빛을 머금은 채 조용히 뒤척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2/12/20181212033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