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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귀하, 그것은 '러브'가 아니었소

김윤덕 문화1부장

입력 2018.08.21 03:14


사랑은 한쪽의 그림자 아니라 서로의 햇살이 되어주는 것
권력을 앞세워 평등이 깨지면 사랑은 고통으로 돌변할 뿐
귀하가 꿈꾼다는 세상에선 부디 모든 여인이 행복하기를


펄펄 끓는 염천에 무탈 강녕하시오. 무슨 더위가 이리도 억세고 맹렬한지. 도성만 벗어나면 숨통이 트일까 하였더니, 방방골골 불판이라 얼음 두 덩이 띄운 냉가배 한 잔으로 겨우 열불을 달래는 중이오. 가배란 것이 참 이상하오. 처음엔 쓴맛만 나던 것이 어느 순간 시었다 돌연 고소해지고. 헛된 꿈, 삿된 사랑일수록 비싸고 달콤하다더니, 가배는 역시 프림 하나 설탕 둘 넣은 아이스믹스가 으뜸이오. 아니 그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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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시냐 물었소? 나를 몰라보는 사내는 사대문 안에 그대가 처음이오, 라고 꾸짖고 싶으나 그건 '애기씨' 대사고, 나로 말하자면 뼈대만 앙상한 집안에 시집와 먹성 좋은 아들 둘 키우며 일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입시교육 치다꺼리하느라 마트 계산대와 학습지 교사를 널뛰며 살아가는 조선의 '아짐씨'요. 역사에 이름 한 줄 남지도 않을 거면서 이 풍진 세상과 씨름하며 사는 아무개의 어미랄까. 그렇다고 업수이 보진 마시오. 명문이라 할 순 없으나 대학물 맛보았고, 먹물이라 할 순 없으나 마르크스엥겔스를 구분할 줄 알며, 짱돌을 던지진 않았으나 최루탄 자욱한 광장에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그 이름도 거룩한 삼팔육 세대! 내 비록 지금은 최저임금에 금쪽같은 알바 잘릴라 밤잠 설치는 아녀자이나, 지체 높은 귀하에게 감히 서신을 띄우는 것은 암울한 시대를 함께 살아낸 동지로서 일말의 연민을 표하고자 함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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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귀하는 한때 우리의 햇살, 우리의 선샤인이었소. 누구보다 정의롭고 누구보다 담대했으며 누구보다 영민하였지. 천수를 누린 나의 증조모께서는 자고로 사람이란 겉만 보고 상찬해서는 아니 된다 하셨으나, 반듯한 이마며 강직한 눈빛, 다감한 목소리의 귀하는 누가 봐도 이 혼돈과 격랑의 조국을 광명의 시대로 이끌 지도자였소.


한데 그토록 고귀한 귀하가 대관절 여인 문제로 벼랑 끝에 서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말마따나 모략가들의 터무니없는 음모이길 바랐소. 허나 귀하는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하더이다.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순간 파도와 같은 절망이 온몸을 덮쳤으나 그 빠르고 결연한 참회에 한 가닥 희망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오. 애석하게도 귀하는 얼마 안 가 말을 바꾸었소. 그것은 러브, 사랑이었다고. 혹자는 러브란 총보다 강하고 그보다 위험하며 그보다 뜨거운 것이라 하던데, 귀하는 담배를 가져오라 하면 담배를 가져오고, 외로워 안아달라 하면 안아주고, 순두부가 먹고 싶다면 순두부 식당을 찾아다니는 것이 러브라 하였더이다. 과연 그러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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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러브란 평등한 둘 사이에 싹트는 것이어서, 어느 한쪽이 권력을 앞세우면 수평은 무너지고 동시에 고통이 되는 것이었소. 수십 년 살 비비며 사는 부부지간도 예외가 아닐진대 생살여탈권이 오가는 상사와 부하 사이에랴. 하물며 스무 살이오. 천하의 이병헌도 스무 살 어린 김태리의 상대역이 되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는 세상. 피할 수 있는데 피하지 않아서 러브라고도 하였소? 피할 수 있는 이가 열에 둘 될까 말까 하니 이를 '위력'이라 부르오. 설마 은장도를 들었어야 했던 것이오? 허옇게 질린 낯빛으로 시선을 바닥에 두고 이야기하던 여인의 표정을 기억하오. 사내들 일탈엔 무한 자비를 베풀다 못해 무죄를 선물하는 조선 땅에서 벼랑 끝에 선 건 귀하가 아니라 그녀인지도 모르오. 구한말 의병도 아닌 자들이 여인 하나를 두고 이렇듯 의기투합하여 몰아붙이니 참으로 쩨쩨한 일 아니오?

마르크스                         엥겔스                           이병헌                            김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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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박이라 느꼈다면 용서하시오. 나 또한 사대부 여인네처럼 수나 놓으며 꽃으로만 살고 싶으나 조선의 어리석고 우매한 권세가들이 이 아짐씨들을 뜨거운 불꽃으로 살게 하니 난들 어쩌겠소. 들끓는 여심(女心)이 야속하기도 할 것이오. 그러나 세상엔 칼로 벨 수 없고 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더이다. 먹고사는 게 최고 존엄인 자들의 의롭고 뜨거운 마음. 바라건대 귀하는 겉으론 민중을 위하고 약자를 위한다면서 그 선의를 이용해 권력을 쟁취하고 백성을 함부로 다루는 가 짜 민주주의자들 중 하나로 역사에 남지 않길 바라오. 모두가 혁명을 이야기하나,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다른 세상이 올 리 없소. 기어이 '다시 태어나겠다'는 귀하가 꿈꾸는 세상에선 부디, '여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절규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오.

한데 끝내 궁금한 것이 있소. 귀하는 왜 그 먼 아라사, 아니 러시아에까지 가서 순두부가 먹고 싶었던 것이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0/20180820035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