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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마음에 상처가 있나요… 詩 한 편 처방해드립니다

양승주 기자

입력 2018.08.21 03:01


'마음 치료법' 권해주는 시대… 고민 듣고 책 골라주는 서점 등장


상처 받은 마음에도 처방(處方)이 있다. 불안과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에 맞는 책이나 시, 심지어 식물도 처방받는다. '마음 처방전'을 받으려면 시간을 들여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아야 한다. 처방에 따른 물건을 손에 넣기도 전에, 마음속 괴로운 짐을 비우면서 위로받는다고 한다.

병원이 아닌데도 처방을 해준 곳은 서점이 처음이다. 고민을 털어놓으면 그에 맞는 책을 처방해주는 '책 처방 서점'은 개인 서점을 중심으로 2~3년 전부터 생겨났다. 서울뿐 아니라 경기, 부산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생겨난다. 책방 주인이 손님과 1시간가량 관심사와 고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알맞은 책을 골라준다. 대부분 예약제로 운영되며 2만~5만원 정도 상담비를 받는 곳도 있다. 서울 창전동에서 '사적인 서점'을 운영하는 정지혜 대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오는 손님들도 있지만, 개인적인 상담이 필요해서 오는 경우도 꽤 된다"며 "책이라는 매개체 덕에 병원의 전문 심리상담보다 마음이 편하다는 반응이 많다"고 했다.



책 한 권이 부담스러우면 시 한 편을 처방받을 수도 있다. 출판사 창비는 올해 1월부터 이번 달까지 매달 한 차례 독자 사연에 맞춰 김현 시인이 시를 추천해주고 처방전을 써주는 '시 처방' 이벤트를 진행했다. '좋아하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 힘들다'는 사연에 김 시인은 '말없이 떠나간 밤을/ 이제는 이해한다'는 시구가 담긴 박소란 시인의 '푸른 밤'을 처방했다. 김 시인은 처방전에 '어떤 헤어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순간이 아니라 일생이 필요하기도 하다'고 썼다. 창비 관계자는 "소셜미디어를 즐겨 이용하며 짧은 글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시가 좋은 위로의 수단이 될 것 같아 시작했는데 매달 평균 120여 명이 신청할 정도로 인기였다"고 했다. 서울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마음 약방' 자판기도 인기다. 500원을 넣고 '분노조절장치 실종' '용기 부전' 등 20여 가지 증상 중 하나를 고르면 그에 맞는 영화나 도서, 그림 등을 추천하는 처방전이 나온다. 2015년 서울시청 시민청(현재는 서울문화재단 청사로 이전)에 1호점이 생긴 뒤, 반응이 좋아 이듬해 서울 대학로에도 설치됐다.

정지혜 & 사적인 서점

   

김현 시인                         박소란 & 한사람의 닫힌 문                                마음 약방 자판기                           

 

이구름 & 슬로파마씨                                                                                                         고강섭                       신광영 


반려 식물을 처방해주는 화원도 있다. 서울 상수동 '슬로우파마씨' 이구름 대표는 직장 생활을 하며 지친 마음을 식물로 치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문을 열었다. '집 안이 너무 쓸쓸하다'는 식의 고충을 듣고 가장 적합한 식물을 골라준다. 이 대표는 "혼자 사는 손님들에게 식물 처방이 특히 인기"라며 "'집 안에 식물을 들여놓으니 적적하지 않고 생기가 돌아 좋다'는 반응이 많다"고 했다.

'마음 처방전'이 젊은 세대에게 소구하는 데는 소비 패턴의 변화가 한몫했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과거 젊은 층의 소비가 주류 콘텐츠에 휩쓸리는 경향이 강했다면, 최근에는 '나만의 것'에 끌리는 경향이 강하다"며 "내 고민을 반영해 '나를 위한 처방'을 해준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젊은 세대가 마음을 터놓을 공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보다 인간관계가 준 데다 비슷한 상황의 또래 집단에게 해결책을 구하기도 어렵다"며 "물건을 구매하면서 비교적 가볍게 고민을 나눌 수 있어 2030들이 끌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21/20180821000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