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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해현의 문학산책] "나를 三流 정치 평론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8.07.26 03:12


작고한 소설가 최인훈 '文學답지 않다'는 비판에도 정치·역사 등 거대 담론 끌어들여 '현대 한국의 사상가' 평가받아
말년엔 유전공학에도 관심 쏟아… 후배들에게도 '발상의 전환' 강조


지난 23일 타계한 소설가 최인훈을 마지막으로 취재한 것은 3년 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작가의 자택에서였다. 최인훈 문학을 연구해 온 독일인 바버라 월 교수(덴마크 코펜하겐대학)가 유럽에서 열릴 한국학회에서 상영하기 위해 최인훈과의 대담을 녹화하는 자리였다. 최인훈은 지난 2001년 서울예술대학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뒤 신작 발표와 대외 활동을 삼간 채 칩거 중이었다. 최인훈은 이날 드라큘라 이야기를 꺼내 대화를 풀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드라큘라' 주연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리가 세상을 떴다. 나는 드라큘라 영화를 좋아했다. 많은 한국 작가가 샤머니즘에서 영감을 얻었듯이, 나는 드라큘라에게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내 소설 '구운몽'은 관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깨어나 마치 드라큘라의 성(城) 속을 돌아다니듯이 도시를 배회하는 것이다."

   

최인훈, 바버라 월 교수                                            크리스토퍼 리, 영화 드라큘라                                       최인훈 소설 광장/구운몽


그 이야기를 듣던 중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다. 최인훈과 드라큘라가 쉽사리 연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을 뒤졌더니, 드라큘라를 짧게 풀이한 대목이 나왔다. 젊은 날의 최인훈이 보기에 '드라큘라는 기독교의 신(神)에 반발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 인간이었고,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지하운동가를 상징했다'는 것이다. 최인훈이 그 또래의 한국 작가들과는 남다른 감수성을 지녔음을 일깨우는 대목이기도 하다. 4·19 세대 문학평론가들에 따르면 최인훈의 등장은 그 이전까지 한국 소설을 지배한 샤머니즘과 토속 정서를 탈피해 세련된 지성의 언어로 쓴 소설의 시작을 알렸다고 한다. 최인훈은 1994년 출간한 자전 소설 '화두'를 읽기 시작했다는 독일인 교수에게 "그 소설을 읽으면 내 생애와 작품 활동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철학자가 아님에도 철학적으로 생각했고, 아마추어 역사학자이면서도 지난 100년 동안 한국 역사의 주요 문제를 되돌아봐야 했다. 한국문학은 민족주의에 꽉 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소설가로만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나를 삼류 정치평론가, 삼류 역사학자, 삼류 박물학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회색인 ,화두, 바다의 편지-인류문명에 대한 사색                                       이문열


소설 '화두'를 두고 '이것도 과연 소설이냐'고 의문을 제기한 비판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한국사와 세계사의 주요 사건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작가의 온갖 생각이 방목(放牧)되어 있다.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라고 하기엔 성찰록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하지만 작가는 '삼류' 소리를 감내하면서 정치와 역사, 철학을 아우른 거대 담론을 소설에 끌어들였다. '화두'를 출간한 뒤 최인훈은 후배 작가 이문열과의 대담에서 "그동안 한국 작가들은 지구의 현재에 대해서, 또는 지구와 인류 등 큰 사이즈의 개념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이제는 그 문제 앞에서 작아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냉전의 종식이 표면적으로는 한쪽 손(자본주의)을 올려준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참신하게 몸으로 발상하려는 순진무구한 내면의 개종(改宗)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작가는 "인간은 경험한 것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에 관념의 도움이 필요하다"라며 "인간이 자신의 문제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관념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쓴 적도 있다. 그래서 최인훈을 소설가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 한국의 사상가로 꼽는 학자도 적지 않다. 최인훈의 산문 중 정수(精髓)를 골라 모은 '바다의 편지-인류 문명에 대한 사색'이 최인훈 사상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최인훈이 등단 40주년을 맞은 해(1999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화두' 출간 이후 또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미발표 소설 몇 편이 있다고 했다. "20세기 가장 큰 사건은 DNA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설계도를 드러낸 DNA 이전과 이후의 철학과 예술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유전공학과 생물학을 다룬 미발표 단편을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다시 2015년 자택에서 이뤄진 마지막 취재를 회상해보니, 그때까지도 그 단편들은 발표되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에 최인훈은 "작가는 누구나 머릿속에 쓸 거리를 가득 담고 있다. 문제는 그걸 언제 쓰느냐"라는 우스개를 던졌다. 그 이후에도 작가의 신작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서랍 속의 미발표 원고 역시 작가의 농담이었던가. 하지만 평소 깐깐했던 성품의 작가가 그런 허언(虛言)을 지어낼 재주를 지녔다고 보긴 어렵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25/20180725037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