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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현우의 팝 컬처] 크로아티아의 숨은 에너지, 록 음악

한현우 문화2부장

입력 2018.07.19 03:13


월드컵 우승 확률 0.6% 불과했던 동유럽 小國 크로아티아,
강렬한 하드록에 바탕한 응원가 열창하며 준우승 차지


프랑스가 선제골을 넣은 지 10분 만에 크로아티아가 반격골을 쏘았을 때, 독특한 유니폼 디자인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이 동유럽 소국(小國)의 어마어마한 에너지에 감격했다. 전반전에서 자책골을 기록했던 선수가 패색 짙던 후반전 상대 골키퍼 공을 빼앗아 추가골을 넣었을 때는 이 나라의 응원가 '싸워라, 나의 크로아티아여(Igraj Moja Hrvatska)'를 따라 불러야만 했다. 월드컵이 열리기 전 우승 확률 0.6%에 불과했던 나라, 정치와 경제가 모두 불안해 청년들이 속속 떠나는 크로아티아를 세계 2위에 올린 에너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월드컵 기간 내내 러시아 경기장과 크로아티아 현지에 울려퍼졌던 노래 '싸워라, 나의 크로아티아여'도 크나큰 힘이 됐을 것이다.

크로아티아 밴드 '자프레시치 보이즈'가 부른 이 노래는 전형적인 하드록이다. 그다지 세련되게 짜이고 연주된 음악은 아니지만, 록 음악의 본질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응원가로 적격이다. 첼로와 바이올린의 짧은 전주에 이어 일렉트릭 베이스와 드럼이 리듬을 끌고 나가면 여러 남자가 화음 없이 제창하는 노래가 등장한다. "싸워라, 크로아티아여/ 너를 볼 때면/ 내 심장은 불타오르네, 불타오르네" 하고 묵직한 바리톤으로 부른다. "불타오르네" 부분은 크로아티아어로 "세체 미 고리, 세체 미 고리(Srce mi gori, srce mi gori)"인데, 동유럽 언어의 격음과 복모음 많은 발음 때문인지 매우 긴장되고 장엄한 느낌을 받는다.


노래는 중간 부분에서 최고조에 오른다. "싸워라 조국을 위해/ 모든 산들과 바다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부분이다. 조국의 산들과 바다가 기다리고 있는데, 선제골을 내줬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일렉트릭 기타가 노래 중간을 청룡언월도처럼 쩍 가르며 등장해 날카로운 연주를 뿜는다. 이어 "나의 소원은/ 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것/ 소리 높여 노래하리니/ 앞으로 나아가라"고 선수들의 심장을 직격한다. 아, 이것이 바로 록 음악인 것이다. 턱없는 것을 갈구하는 자, 록 음악을 들을지어다. 록 음악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결승전을 앞둔 인터뷰에서 크로아티아 선수들이 "나의 동료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반면 잉글랜드의 응원가는 크로아티아를 4강에서 물리치기엔 너무 나약했다. '축구가 고향으로 오고 있네(Football's Coming Home)'로 알려진 잉글랜드 응원가는 1996년 만들어졌다. 1960년 시작된 유러피언 챔피언십 대회가 그해 처음 근대 축구의 발상지인 잉글랜드에서 열리자, '라이트닝 시즈(The Lightning Seeds)'라는 밴드가 만들어 발표했다. 원제는 '세 마리 사자들(Three Lions)'로, 잉글랜드 축구팀 문장(紋章)에 그려진 세 마리 사자를 뜻한다.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 월드컵과 유러피언 챔피언십에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던 잉글랜드는 그해 '축구의 고향'에서 유럽 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이 노래를 널리 불렀다. 가사 역시 딱히 우승을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셔츠에 그려진 세 마리 사자/ 30년간의 실망도/ 내 꿈을 막지는 못했네/ 오고 있네/ 축구가 고향으로 오고 있네" 같은 평범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대회 4강에서 독일과 승부차기 접전 끝에 6대 5로 석패한 잉글랜드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 큰 기대를 걸게 됐다. 결국 이 노래는 '98년 버전'으로 개작되면서 "(축구가 아닌) 월드컵 우승이 고향으로 오고 있네"라는 뜻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20년 넘게 응원가로 불리고 있다. 잉글랜드 축구 팬들 역시 크로아티아 못지않게 이 노래를 목청껏 불렀으나, 태생이 멜로디 위주 브릿팝이어서인지 이번 월드컵 4강에서 '싸워라, 나의 크로아티아여'를 부른 팀에 결승전 티켓을 넘겨주고 말았다.

록 음악은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야구엔 어울리지 않는다. 배 나온 선수가 안타를 친 뒤 마르고 발 빠른 선수에게 주루를 부탁하는 경기에서는 다른 노래를 불러야 한다. 축구는 일촉즉발의 수세(守勢)에서 태클로 공을 빼앗은 뒤 전원이 초겨울 땅거미처럼 적진으로 몰려가는 경기다. 죽기 살기로 하는 스포츠엔, 죽기 살기로 하는 음악이 제격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18/201807180374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