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윤 음식전문기자
입력 2018.07.05 03:12
한때 고급 레스토랑 뺨쳤고 지금도 웬만한 음식점 수준
소음 차단하고 소금·설탕 더 넣어야 地上과 맛 비슷
맛없다고 투덜대면서도 먹게 되는 음식이 기내식이다. 물론 소수의 탑승객이 즐기는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에서 제공되는 건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 배고프지 않으면서 그다지 맛있지 않은 음식을 꾸역꾸역 비우는 건 비행할 때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내는 위안을 음식으로부터 얻기 때문일 수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기내식(機內食)은 1919년 설립된 영국 항공사 '핸들리 페이지 트랜스포트'가 같은 해 10월 취항한 런던~파리 노선에서 처음 제공했다. 탑승객은 샌드위치와 과일 몇 가지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가벼운 스낵 수준이던 기내식은 1950~60년대 항공 여행이 본격화하면서 제대로 된 한 끼 식사가 됐다. 과거에는 항공료를 각국 정부가 통제했다. 가격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내식은 타사와 차별화하는 서비스로서 중요했기 때문에 항공사들이 대단히 신경 썼다.
스칸디나비아항공이 2016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공개한 1960년대 사진 속 기내식은 고급 레스토랑 뺨친다. 스튜어디스가 밀고 나온 카트에는 바닷가재, 캐비아 등 고급 음식이 가득하다. 높은 토크(toque·요리사 모자)를 쓰고 새하얀 조리복을 입은 요리사는 오븐에 구운 커다란 고기를 손님 앞에서 커다란 칼로 직접 썰어서 제공한다. 전문 소믈리에는 와인은 물론 샴페인, 코냑, 위스키 등 다양한 음료를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서빙한다. 이코노미·비즈니스·일등석 좌석 구분이 없어 모든 승객이 동등하게 미식(美食)을 즐겼다. 항공 여행이 지하철 타듯 쉬워지고 고속버스 수준으로 저렴해진 요즘은 이런 호사(豪奢)를 일등석이나 비즈니스석 탑승객이 아니면 누리기 힘들다.
과거처럼 값비싸고 화려하진 않지만, 가격 대비 품질을 따져보면 요즘 기내식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 몇 해 전 기내식을 조리해 납품하는 업체를 취재하러 갔다가 놀란 일이 있다. 일반 이코노미석 기내식에 사용되는 재료 품질과 이를 요리해 만든 음식 맛이 웬만한 음식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업체 관계자는 "조리가 불가능한 기내에서는 미리 조리된 음식을 데워 낼 수밖에 없어서 탑승객이 실제 먹을 때는 맛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기내식 맛이 별로인 건 비행기라는 특수한 조건 때문이기도 하다. 비행기가 운항하는 3만 피트(약 9㎞) 상공에 올라가면 기압과 습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맛을 감지하는 미각(味覺) 세포와 냄새를 맡는 후각(嗅覺) 세포는 기압과 습도에 영향받는다. 혀에 있는 미각 세포는 기압이 떨어지면 맛 감지 기능이 저하된다. 특히 단맛과 짠맛을 잘 느끼지 못한다. 소금과 설탕을 30% 더 넣어야 지상에서 먹을 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기내식이 의외로 열량이 높은 이유이다. 신기한 건 신맛과 쓴맛, 매운맛 감지 능력은 거의 그대로다. 코는 음식의 맛을 감지할 때 혀만큼 중요한데, 낮은 기압은 후각을 떨어뜨리는 데다 음식의 냄새 분자 수를 줄여 냄새 맡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시끄러운 소음도 기압과 습도만큼 미각에 영향을 미친다. 비행기 엔진 소리는 지상에서처럼 맛을 느끼는 일을 방해한다. 단, 감칠맛만은 소음 속에서 오히려 강하게 느껴진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찰스 스펜스(Spence) 교수는 맛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그는 "토마토 주스가 기내에서 주문하는 음료수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며 "토마토에 감칠맛을 내는 글루탐산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스펜스 교수는 높은음이 많이 포함된 소리를 들으면 단맛을 더 강하게 느끼는 반면, 낮은음이 많이 포함된 소리를 들으면 쓴맛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찰스 스펜스 교수
기내식 중 업계 관계자들이 추천하는 메뉴는 스튜(stew)류와 빵, 아이스크림이다. 고기와 채소를 소스에 넣고 찌개처럼 끓인 스튜는 다시 데워도 원래 맛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러니 스튜어디스가 "소고기와 닭고기 중 어떤 걸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물으
면 "어떻게 조리한 건가요"라고 되물을 일이다. 빵은 아무리 일러도 비행기 출발 24시간 이전에 구워 기내식 중 가장 신선하다. 스튜와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은 지상이건 상공이건 어디서 먹건 맛 차이가 별로 없다. 다음 비행기 탈 때는 헤드폰으로 소음을 최대한 차단하고 높은음이 많은 음악을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기내식이 문제없이 제공된다면 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7/04/2018070404387.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국 주말 낮기온 33도 이상 찜통 더위... 폭염특보 확대·강화 (0) | 2018.07.14 |
---|---|
[인문의 향연] 여성의 敵은 남성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 (0) | 2018.07.10 |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남자가 詩를 쓰기 시작했다 (0) | 2018.07.03 |
[Why] 평안도 사투리의 '가고파' 작곡가, 음악계서 그를 따돌림한 이유가… (0) | 2018.06.30 |
[Why] 금속탐지기 통과 거뜬… 휴대폰·음란물도 넣어주는 '옥바라지 업체' (0) | 2018.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