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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김헌의 서양고전산책] 풍요와 축제를 데리고 온 평화의 女神 에이레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입력 2018.06.12 03:11


아테네·스파르타의 10戰亂에 두려움 사로잡힌 그리스위해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평화' 발표


평화의 여신이 구덩이에 갇힌 적이 있었다. 여신의 이름은 에이레네, 최고의 신(神) 제우스와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딸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런 혈통으로 에이레네를 상상한 것은 정의가 세상을 다스릴 때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평화의 여신이 봉변을 당했던 것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한판 붙고, 그리스의 도시들이 둘로 갈라져 격렬하게 싸웠던 때였다. 두 도시는 동쪽의 거대 제국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했을 때, 한마음 한 뜻으로 똘똘 뭉쳤다. 스파르타의 용맹스러운 육군은 페르시아 대군의 돌진을 막고, 아테네의 날렵한 해군은 페르시아 함대를 침몰시켰다. 둘이 힘을 합하니 천하무적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는 그리스 번영의 발판이 되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물러나자, 두 도시는 그리스의 패권을 두고 팽팽하게 맞서다가 기원전 431년에 마침내 전쟁을 터트렸다. 역사가(家) 투키디데스가 이처럼 큰 전쟁은 없었다며 촘촘히 기록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제우스, 정의의 여신 테미스, 투키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때부터 10년 뒤인 기원전 421년에 25세의 당찬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지속되는 전쟁에 지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민들 앞에서 '평화'라는 희극을 발표했다. 주인공은 괴짜 농부 트뤼가이오스였다. 극이 시작되면 그는 전쟁 때문에 농사를 망쳐 못살겠다며 하늘에 올라가 제우스에게 따지겠다고 방방 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사다리를 만들어 구름에 대고 오르려다가 휘청거리는 바람에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치고도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그때의 부상으로 제정신이 아닌 듯, 두 번째 시도는 더 황당하고 더 과감했다. 쇠똥구리를 말만 하게 키워 그놈을 타고 신들의 궁전으로 날아간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궁전은 텅텅 비어 있다. 전쟁의 신 폴레모스가 다른 신들을 다 몰아내고 왕 노릇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평화의 여신을 구덩이에 처넣고 돌무더기를 쌓아 올려놓고는 제 세상이라는 듯 의기양양 씩씩거린다. 몸을 숨긴 트뤼가이오스는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이놈이 이렇게 설쳐대니까 땅 위의 인간들이 맨날 치고받고 싸움질이지. 어디 농부들이 맘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가 있겠어!'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쟁의 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트뤼가이오스는 평화의 여신을 구한다. "그리스인들이여, 상냥한 평화의 여신을 구덩이에서 지금 당장 끌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과 전쟁에서 해방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 돌무더기를 치우고 구덩이에 밧줄을 던져 넣고 힘껏 당긴다. 마침내 구덩이에서 나온 평화의 여신! 그런데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풍요와 축제의 여신이 곁에 있다. 흥미로운 신화적 상징이다. 약관의 시인은 '전쟁은 우리에게 빈곤과 고통만을 줄 뿐이다. 평화로운 세상이 와야만 풍요를 누릴 수 있고, 풍요 속에서만 맘껏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을 무대에 담아낸 것이다.

마침내 트뤼가이오스는 평화와 풍요와 축제를 모시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전쟁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들의 강림을 보며 환호성을 올린다. 그러나 우울한 자들도 있다! 무기상과 무기 제조업자들이다. 그들은 '이제 망했다'며 트뤼가이오스에게 윽박지른다. 그는 기죽지 않고 유쾌한 대안을 내놓는다. '이제 투구의 깃털로는 청소나 하시고, 투구는 바가지로 쓰시라. 흉갑은 휴대용 변기에 안성맞춤이니 그리 써먹고, 진격 나팔로는 저울을 만드시라. 창은 두 동강 내서 포도나무 받침대로 쓰면 딱이로구먼.' 무기 팔아 부를 쌓던 이들은 분한 표정으로 줄행랑이다. 평화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트뤼가이오스의 결혼식이 축복 속에 거행되며 희극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의 공간 속에서 펼쳐진 연극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며칠 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10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는 종전을 선언하고 극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젊은 예술가의 과감한 상상력이 현실을 만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는 역 사의 흐름과 시민들의 갈망을 똑똑하게 읽어내 무대를 수놓았던 것이리라.

아테네 시민들은 꿈만 같은 일의 실현을 목도하고 평화의 꿀맛을 가슴 벅차게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240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곳의 '평화'의 무대가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재현되길 바라는 마음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평화가 풍요와 축제와 함께 우리와 함께하시길!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11/20180611032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