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1부장
입력 2018.05.29 03:14
20년 만에 본 대학 시절 '퀸카'
화사한 얼굴, 몸매 그대로인데 두 아들 키우며 직장 다니다 가슴에 혹 생겨 수술까지 했네
"이 가열한 삶 자식들은 알까? 그래도 꿋꿋이 살아남을 거야"
J를 만난 건, '셀럽파이브'가 유튜브 바다를 휘젓고 있을 때다. 한물간 개그우먼들이 빨갛고 노란 투피스를 입고 나와 디스코 리듬에 맞춰 춤추는 영상이 100만뷰를 돌파했대서 온 나라가 시끌시끌했다. 막춤이라 깔보고 따라 했다간 발목 꺾이기 십상. 다만 그 뻔뻔하고 우악스러운 표정이 거울 속 누군가와 판박이라 시큰 연민이 솟았다. J는 달랐다. 대학 시절부터 일찌감치 줌마계로 분류된 우리완 타고난 원판이 달랐다. 미세 먼지 자욱한 봄날 광화문 대로변에서 J를 한눈에 알아본 것도 그 우월한 외모 덕이다. J에 대해 풍문으로 들은 건 두 가지였다.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졸업하자마자 외국계 기업에 입사한 것, 떠르르한 혼처 마다하고 농활에서 만난 고학생과 열애 끝 결혼했다는 것.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머쓱한 내게 J는 유방암 수술한 사연, 고3·중3 아들과 사는 얘기를 봇물로 토해냈다.
셉럽파이브: 김영희, 안영미, 김신영, 송은이, 신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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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암이 아니고 암이 될 뻔한 혹 덩이를 제거한 수술이었지. 수술실 앞에서 등 터진 환자복을 입고 대기 중인데 큰 녀석한테 전화가 걸려오더군. 장남이라 다르구나 싶어 목울대가 뜨거운데, 이 자식 하는 말. "엄마 카드로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도 돼?" 마취에서 깨 사방이 어질한데 전화가 또 걸려와. "엄마, 라면 어디 있어?" 집과 회사를 널뛰며 살아도 식구들 생일은 목숨 걸고 챙긴다가 내 철칙인데, 정이 가기만 하지 돌아오진 않더라고. 회사 동료들이 내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사왔길래 먹고 남은 걸 집으로 들고 왔더니 남편이 반색하며 물어. "오늘 누구 생일이야?" 반쪽짜리 빵 위에 촛불 켜고 생일 축하 노랠 부르는데 두 아들놈 연신 하품만. 돌연 남편이 베란다로 내달리더니 박스를 한 개 들고 오네. 한 상자에 5만원 하는 짭짤이(대저)토마토. 남편이 통 크게 말했지. "생일이니 너 혼자 다 먹어!" 결혼기념일에 미나리 다발 받아본 적 있니? 퇴근길 남편이 하얀 잔꽃 우수수 핀 다발을 한 아름 안고 들어섰지. 안개꽃인가 싶어 얼른 받아드는데, 남편이 외쳤어. "얘들아, 오늘 저녁은 미나리 데쳐서 와사비 간장에 실컷 찍어먹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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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남자애들은 판판 놀다가도 때 되면 무섭게 파고든대서 기다린 세월이 17년. 정말로 첫 모의고사가 닥치니 새벽까지 불이 훤해. 너무도 황송하여 몰래 들여다보니 유럽 프리미어 리그 축구 경기를 시청하고 계시더군. 자고 일어나면 바뀌는 게 대한민국 입시. 교육부총리도 몰라서 헤매는 입시를 일개 맞벌이 엄마가 무슨 재주로. 마음이나 일찍 비웠으면 가슴에 혹 덩이는 안 달았을걸. 그래서 완전히 내려놨지. 자고로 창생의 고통 어린 삶을 맛본 자가 왕업을 이루는 법. 훗날 우레처럼 떨쳐 울릴 사람은 구름으로 먼저 떠돈다 하였으니 철부지 내 아들도 세상 쓴맛 신맛 다 겪으면 득도하는 날 오지 않을까. 시험이 내일인데 동이 트도록 축구 중계 보는 배짱도 아무나 못 갖는 비범. 로봇과학자에서 축구선수로, 요리사에서 파일럿으로 해가 바뀌면 꿈도 바뀌는 천하태평 내 아들을 보면, 포커플레이들 판치는 엄혹한 세상에서 저 대책 없는 낙관과 무딤 또한 삶의 강력한 무기가 되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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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혼식에 널 초대 못 해 미안. 목동 파리공원에서 열린 '세기의 결혼식'이었지. 날은 춥고 바람은 왜 그리 불던지. 고시에 거푸 낙방하다 변두리에 작은 카페를 연 사위가 야속해 친정 부모님은 연신 눈물만 찍어내는데, 고향서 관광버스 대절해 올라온 남편 친구들은 만세 부르며 축포를 터뜨리다 내 웨딩드레스에까지 빵꾸를 냈지. 울다 웃느라 눈두덩이 빨개도 사랑은 이처럼 뜨거워야 한다고 믿었던 시절. 빤쓰 바람에 만고강산 코 골며 자는 반백의 남편을 보면, 우리가 정말 사랑했던 걸까 회의가 몰아치다가도, 살가운 맛이라곤 없이 노상 도끼눈 뜨고 으르렁대는 여자와 곁눈질 않고 살아준 20년 세월이 뭉클해 이불을 덮어주게 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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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리필한 J가 동영상을 하나 보여줬다. 지난해 열성 고객 감사 파티에서 마케팅팀 후배와 듀엣으로 선보였다는 '아임 쏘우 섹시
'. 까만 정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펑키 리듬에 맞춰 춤추는 화면 속 J는 스무 살 때와 다름없이 늘씬하고 요염했다. "운동권도 아니었던 내가 이렇듯 가열차게 사는 걸 우리 집 세 남자는 알까?" 올해 연습하는 춤은 '셀럽 파이브'란다. "숨이 깔딱 넘어갈지도. 그래도 꿋꿋이 살아서 다시 만나자."
파도 같은 군중 사이로 손 흔들며 사라진 그녀는, 정말 예뻤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8/201805280347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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