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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東語西話] '복우물'은 이름만 남았지만 '복샘'은 맑은 물이 넘치네

원철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입력 2018.05.24 03:11 | 수정 2018.05.25 09:30


우물 중심으로 마을 이루고 살아 '福井' '福泉' 같은 이름도 많아
같은 샘물도 사람 마음에 따라 탐욕·청렴의 상징으로 달라져
온갖 기대·바람을 담는 건 人間… 샘물은 주어진 몫 할 뿐 허물 없어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의 단출한 절에 있는 사형(절집 형님)과 함께 동네 유람을 했다. '복우물(福井)'로 불리는 이 일대는 지역 주민이라야 안내할 수 있는 숨어 있는 생활문화유적이다. 게다가 복우물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다. 그 사실도 아는 이가 드물다. 토박이만 알 뿐이다. 그럼에도 복정동이라는 동네 이름은 남았고, 도로명인 복정로가 있다. 복우물은 지하철역 이름(복정역)으로 되살아났다. 우물은 없어졌어도 그 이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유는 아마 '복(福)'이라는 글자의 힘 때문일 것이다. 2016년 연등회(燃燈會) 때 서울 종로거리 행렬에는 '복우물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조선 중기 연일(延日) 정씨(鄭氏)가 이곳을 세거지(世居地·일종의 집성촌)로 삼은 후 가문이 번창했다. 모두 안마당에 있는 복우물 덕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남한산성 인근의 마을인지라 병자호란 같은 큰 난리는 우물의 복 정도로 피해낼 수 없었다. 외척(外戚) 관계인 남양 홍씨 후손들이 같이 동네를 지키면서 '복우물 마을 유래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5년에는 모양만 갖춰놓고 쓸 수는 없는 우물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복우물의 원수(源水)이자 발원지인 감로천(甘露泉)을 가진 망경암(望京庵)조차 요즘은 상수도 물을 끌어와야 할 만큼 주변과 땅 밑의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 복우물이 지금까지 존재할지라도 거대화된 도회지를 감당할 순 없을 것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를 시정(市井)이라고 불렀다.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며 살았기 때문이다. 사막의 오아시스 지역도 마찬가지다. 사찰도 그랬다. 어디건 사람 사는 곳은 물이 좋아야 한다. 육조 혜능(638~713) 선사가 중국 남부 광둥성 조계(曹溪) 인근에 선종의 최초 사찰을 만들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지팡이를 꽂아 샘물을 솟게 한 일이다. 이른바 '진석탁지천(振錫卓地泉)'이다. 바닷물에도 이름을 부여하고 강물에도 이름을 달고 호수에도 이름을 짓고 우물과 샘에도 작명이 필요하다. 이왕이면 좋은 이름을 붙일 일이다. 그런데 예외도 있다. 도천(盜泉·도둑샘)으로 불린 샘물이 그렇다. 공자 같은 성인도 이름 때문에 이 샘물 마시길 거부했다. 매우 목이 말랐지만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물맛은 원인이 아니었다. 도둑촌에 있는 샘이거나 산적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물을 마시게 되면 남의 것이라도 무조건 자기 손에 넣으려고 하는 도벽(盜癖)이 생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육조 혜능 선사, 공자


'탐천(貪泉·탐욕의 샘)'이라는 샘도 있다. 도천보다는 한 등급 아래다. 이름처럼 마시면 욕심이 자꾸 늘어나는 물이었다. 진(晉)의 청백리 오은지(吳隱之·?~ 413)는 일부러 그 물을 마시고도 청렴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샘은 염천(廉泉·청렴의 샘)으로 불리었다. 동일한 샘물이지만 어떤 마음으로 누가 마시느냐에 따라 탐천이 되기도, 염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복정(福井)처럼 복이 콸콸 쏟아질 것을 기대하는 '복(福)'이라는 글자는 매우 인기가 높았다. 중화요리집은 복이 쏟아지라고 글자를 거꾸로 붙여 놓을 정도다. '복천(福泉)'을 충북 보은 속리산에서 만났다. 등산객들은 목을 축인 후 복주머니에 복을 채우듯이 물통에 물을 담아가곤 했다. 아예 주차장에 승용차 혹은 용달차를 세워놓고 큰 통 몇 개를 실어 가기도 한다. 복이란 많을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도 복천에 대한 기록을 빠뜨리지 않았다. 남몽뢰(南夢賚·1620~ 1681)는 속리산을 다녀간 뒤 기행문인 '유속리산록(遊俗離山錄)'을 썼다. '절벽에서 실처럼 면면이 끊이지 않는 물을 모으고 나무를 쪼개 수로를 만들고서 부엌의 나무통에 흐르게 했다'고 묘사했다. 함께 있던 자중(子中)이 '복천물을 마셨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 덕담도 덧붙여 기록했다. 복천이 얼마나 유명했던지 암자 이름까지 복천암(福泉庵) 이다. '동국여지승람'이 그 사실을 기록한 복천(福泉)은 아직도 건재하다.

하긴 우물과 샘물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그 물에 사람들의 욕심과 기대가 투영되다 보니 도천(盜泉)처럼 기피 대상도 되고, 없어진 복정처럼 아쉬움의 대상도 되고, 남아 있는 복천처럼 사랑을 받기도 하는 것 아니겠는가. 복우물은 이름만 남겼으나 복샘은 현재도 주어진 몫을 다하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3/20180523037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