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돈규 기자
입력 2018.04.21 03:02
[Why 뉴스초점] 청와대 국민청원 , 이대로 괜찮나
하루 700여 명이 청원
'이승훈 금메달 박탈' 등
행정부 관할 범위 벗어난 청원도 적지 않게 쏟아져
역기능보다 순기능 많지만…
국민 소통창구 역할 하지만 미확인 사실 공론화하거나
분노배출 하수구 돼선 안돼
개선할 방법은 없나
무분별한 청원 심사 요건 정부가 간명히 정리해야
'김기식 해임' '외유에 대해 국회의원 전수조사해라' '절대 사임하면 안 됩니다' '도덕성에도 평균이 있나요?' '삼성 위조 주식 사건을 김기식으로 덮으려는 금융 적폐' '김기식은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청와대는 적당히 해라'….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은 이달 초부터 '김기식'에 대한 각종 청원으로 왁자지껄했다. 그를 둘러싼 청원만 750여 건. 참여연대 출신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의원 시절 피감 기관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다녀온 것을 비롯해 여러 의혹에 대한 찬반이 갈렸다. 청와대는 적법 여부 판단을 선관위에 넘겼고, 선관위는 지난 16일 "의원 임기 막판에 후원금(5000만원)을 자신이 관련된 연구소에 기부한 것은 위법"이라고 밝혔다. 그는 2주 만에 사퇴했다.
최근 국민 청원 게시판에는 '이승훈 금메달을 박탈해달라' '(성추행) 김생민 방송 하차' '롯데자이언츠 구단 해체' 같은 청원이 올라왔다. 모두 청와대의 권한 밖이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논란'이 일자 '조 전무의 갑질을 처벌하라' '국적 항공사인 대한항공의 사명을 바꾸라' 같은 요구가 쇄도했다. 지난 14일에는 TV조선이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이 댓글 조작단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보도한 직후 'TV조선 종편 허가 취소' 청원이 등장했다. 이 청원에 대한 동의는 19일 현재 16만명에 이른다.
김기식, 이승훈, 김생민, 조현민, 김경수
청와대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취지로 지난해 8월 국민 청원 게시판을 만들었다. 어느 청원에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이 동의하면 답을 해준다. 그동안 올라온 청원은 16만7000여 건. 하루에 700건꼴이다. 국민 청원에 참여한 적이 있다는 회사원 이모(44)씨는 "지난 정부는 여론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러웠는데, 청와대와 직접 소통할 공간이 생겨 반가웠다"면서 "국민 청원이 미확인 사실을 공론화하거나 분노를 배출하는 하수구가 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과 소통 반갑지만 부작용 우려도
지난달 취업 포털 사이트 인크루트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민 청원 게시판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이 더 많다. 성인 남녀 3516명 중 83.7%가 "사회적 약자에게 표출의 장을 열어줬다"며 '잘 만든 것 같다'고 답했다. 보완책으로는 '(익명 청원이 아닌) 실명제 도입' '청원 남발을 줄이는 기준 마련' '개인의 인권 보호 보장' 등이 꼽혔다.
그동안 답변된 청원은 '청소년보호법 폐지' '국회의원 급여를 최저 시급으로' '조두순 출소 반대' '권역외상센터 추가 지원'을 비롯해 21개다. 권역외상센터 추가 지원에 대해서는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국종 아주대 교수를 3시간 동안 인터뷰한 뒤 청원에 답했다. 정혜승 청와대 뉴미디어 비서관은 "청원이 이렇게 많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일각에서는 '이상한 청원이 적지 않다'고 하지만 집단 지성으로 걸러진다고 생각한다"며 "국회의원 최저 시급을 비롯해 몇 가지는 이게 과연 청원을 할 수 있는 내용인가 싶지만 민심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조두순, 박능후, 이국종, 정혜승
국방부 관계자가 지난 4일 "청와대 국민 청원에 재조사 요구가 국민 20만명의 동의를 얻으면 그때 가서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공영방송 KBS가 천안함 폭침 의혹을 다루고, 북한 노동신문이 "폭침은 남한의 조작극"이라고 주장한 직후였다. 국방부 입장에 대해 '이런 식이면 각 부처가 유명무실해지는 것 아니냐' '정부가 결정을 회피하고 국민에게 떠넘기는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잇따랐다. 김병민 경희대 교수(행정학)는 "청와대 국민 청원이 국민의 소통 창구 역할을 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행정부 관할 범위를 벗어나 입법부나 사법부가 맡아야 하는 청원이 적지 않다"며 "정부가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내용이라면 단 한 사람의 궁금증에도 책임 있게 답해야 하는데, 단순히 '20만명'이라는 숫자 논리로 접근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반면 김학린 단국대 경영대학원 교수(협상학)는 "국민 청원 게시판은 역기능보다 순기능이 많다"며 "민원 해결의 장이라기보다는 토론의 장으로 생각하면 된다. 얼토당토않은 청원은 어차피 동의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김병민, 김학린, 박성희, 드루킹
"'기술자들의 놀이터' 될 수 있다"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은 국민적 여론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할지 말지, 학교생활기록부종합(학종) 전형 비율을 줄여야 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청원과 역(逆)청원이 올라온다. 심지어 '국민 청원을 폐지하라'는 청원까지 등장했다. "인민재판 같은 청원 게시판을 왜 세금 써가며 운영하느냐"는 비판이다.
청원 게시판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계정으로만 접속할 수 있다. 지난 2월 일부 이용자가 카카오톡을 통해 무제한 중복 동의를 한 정황이 발견됐다. 청와대는 카카오톡을 통한 연결은 중단했다. 하지만 네이버도 1인당 3개까지 계정을 만들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한 청원에 각각 다른 계정으로 접속해 중복 동의를 할 수 있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정보학)는 국민 청원 게시판에 대해 "국민이 답답할 때 하소연할 출구일 수 있지만 개인이 의존할 창구로는 한계와 문제가 적지 않다"며 "동원력을 가진 소수 '기술자들의 놀이터'가 될 개연성이 높고 디지털 디바이드라는 정보 격차의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 시스템이 놓친 개인의 문제를 청취하고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집단의 운동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박 교수는 "국민 의견을 청취하는 방법으로는 부처마다 대국민 창구가 있고 여론조사도 있다. 지난해 9월 240번 버스 사건처럼 요즘은 인터넷이나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 곧장 여론화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발생한 더불어민주당 당원의 '인터넷 댓글 조작' 사건이 국민 청원 게시판에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김병민 교수는 "이번 '드루킹'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집단이 온라인 댓글 공간에서 숫자를 조작하는 게 가능하다"며 "국민 청원에서도 특정 정치적 목적을 숨긴 청원 글을 올리고 동의가 많아지도록 '작업'하면 어느 순간 국민 대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둔갑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대한민국 헌법 26조는 모든 국민이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국가는 이런 청원에 대해 심사할 의무를 진다. 한 달 안에 20만명이 동의해야만 정부에 내 목소리를 전달하고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청원법상 청원은 청원할 수 있는 사항, 방법과 이의 제기 기간, 청원 심사 기간 등이 다 정해져 있다. 실명을 써야 하고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타인을 모욕한 경우에는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어떻게 개선해야 하나
청와대 국민 청원이 좋은 취지와 달리 집단 압력의 창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때로는 인기투표로 변질되고 문제 해결에도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 국민 청원 게시판으로 몰리면서 청와대가 전지전능한 입장이 돼버렸다. 입법부나 지자체가 할 일을 청와대가 사실상 가로채면서 중앙 집권이 더 강화되고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정혜승 비서관은 "청와대가 답할 수 없는 청원도 있지만 실태를 파악하고 각 부처나 입법부와 조율하고 협의해 상황을 정리해드리고 있다"며 "문제점이 발견되면 보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드루킹' 사건과 같은 여론 조작 위험에 대해선 "(국민신문고와 달리) 실명이 아닌 익명 인증으로 출발할 때부터 어뷰징(abusing·악용) 가능성은 인지하고 있었다"며 "100% 막을 방법은 없다. 중복 서명이 없는지 모니터링하면서 대응하고 있다"고 답했다. 김병민 교수는 "무분별하게 제기되는
청원의 심사 요건을 간명히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행정부 권한 밖에 있는 청원은 심사하지 않는다고 공표하고, 20만명의 동의를 얻지 못하더라도 중요한 청원이라면 면밀히 검토해 결과를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희 교수는 "자유롭고 중립적인 개인들이 국민 청원 게시판을 신뢰하고 찾도록 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20/201804200172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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