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육아에 손주 교육까지… '학조부모'가 간다

유소연 기자

입력 2018.01.24 03:04


[학교·학원가에 '할머니 치맛바람']

학원 데려다주고 숙제 챙기고 책 함께 읽으며 영어 직접 과외도
입시설명회에 조부모 참석 급증사춘기 손주 위해 상담까지 받아
부모와 교육관 달라 가끔 충돌도


경기 성남에 사는 정모(65·여)씨는 매주 화요일·목요일 오후에 영어유치원이 끝나는 손자 예찬(5·가명)이를 돌보러 서울 용산으로 간다. 바쁜 아들 내외가 퇴근할 때까지 영어책을 읽어주거나 예찬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낸다. 30분 정도는 영어 숙제를 직접 봐주고 있다. 7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한 그는 영어 교사로 일해오다 4년 전 퇴직했다. 정씨는 "학습 시터(도우미)를 구할 수도 있지만 내가 직접 봐주는 게 마음이 더 놓인다"고 했다.

학조부모(學祖父母) 등장

손주를 키우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육아를 넘어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교육 현장에선 이들을 일컫는 '학조부모'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과거엔 조부모가 손주를 돌봐도 학교 일은 부모가 챙겼다면, 요즘은 학부모 모임과 학원 일정 관리, 숙제까지도 할머니 손길이 닿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 목동의 한 학원 원장은 "아이 입시에 성공하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며 "요즘은 '할머니의 운전 실력'이 하나 더 추가됐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손주를 키우는 손모(76·여)씨는 아예 경기도에서 손주가 있는 서울로 이사했다. 손주가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원에 데려다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손주 교육을 위해 교육과 관련된 책 수십 권을 읽었다. 한때는 미술·피아노 학원을 직접 알아보고 보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국어·영어·수학 위주로 집에서 과외를 시키고 있다. 하루 두 시간 정도는 손주 옆에서 책을 함께 읽는다. 그의 자녀들은 모두 명문대를 나왔다. 손씨는 "애를 처음 키워보는 딸보다는 자식 둘 좋은 대학 보낸 내가 더 아이 교육을 잘 시키지 않겠느냐"며 "손주가 레고 조립을 잘하니 공학박사를 시켜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했다.

거세지는 '할머니 치맛바람'

학원가에서는 이런 학조부모 바람이 생긴 지 오래다. 특목고 설명회를 열 때마다 조부모들이 참석하거나, 입시 상담에 부모 대신 오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종로학원 하늘교육 임성호 대표는 "부부 의사인 딸과 사위를 대신해 강원도 원주에서 매번 서울로 와 입시 설명회를 듣고 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며 "이미 자녀를 키우며 사교육을 경험하고 입시를 겪은 사람들이 손주를 보면서 학조부모가 늘었다"고 했다. 사교육 업계에선 고학력을 가진 할머니·할아버지, 특히 스스로 교육 전문가라고 자신하는 교사 출신 조부모들이 학조부모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학교에선 '할머니 치맛바람'이 거세다. 서울 구로의 한 초등학교는 딸·며느리를 대신해 녹색어머니회 교통지도에 참석하는 할머니들이 많아지자 아예 '할머니 봉사단'을 꾸렸다. 녹색어머니회는 말 그대로 어머니만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당 청솔중에서 진로 상담을 맡고 있는 정선미 교사는 "열의 있는 할머니들이 상담을 오거나 시험감독에 들어오기도 한다"며 "사춘기에 들어선 손주를 어떻게 엇나가지 않게 키울지 고민하는 조부모가 많다"고 했다.

임성호 대표, 정선미 교사

조부모와 부모의 교육관이 달라 아이가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시어머니에게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맡기는 채모(38)씨는 요즘 시어머니의 과도한 교육열 때문에 속앓이 중이다. 그는 "시어머니는 수학 학원을 보내려 하고 아이는 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통에 중간에서 난감하다"며 "자녀 교육 주도권을 뺏긴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4/20180124001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