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 조계종 포교연구실장
입력 2018.01.25 03:12
고려 文人 이규보는 60대 은퇴 후에도 외교문서 작성
교사 부부는 퇴직 후 日서 요리 공부하고 우동집 차려
이처럼 은퇴 후에도 인생의 길은 다양
고령화 시대에 우리 사회에 묵직한 話頭 던져
은퇴 출가(出家·세상을 떠나 수행 생활을 하는 것)를 꿈꾸는 이가 찾아왔다. 정년퇴직을 몇 년 남겨둔 상태다. 그는 태어난 지 몇 년 후에 출생신고를 했다.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엔 흔한 일이다. 읍내로 가는 마을 이장(里長)에게 부탁했더니 무슨 연유인지 나이를 세 살이나 더 부풀려 호적에 올렸다. 그 바람에 형뻘인 동급생들에게 '말을 놓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본의 아니게 나이를 속인 것에 대한 괴로움이 문득문득 그를 괴롭혔다. 급기야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발전했다. 오십이 넘어 시작한 명상 수행 덕분에 그 미움의 실체를 알아차린 뒤에야 미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정년퇴직 후 명상을 본격적으로 해보겠다는 마음을 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강화도 다리를 지나 목적지인 백운 이규보(1168 ~1241) 선생 묘소 앞에 도착했다. 여주 이씨 문중에서 만든 커다란 비석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한 자씩 한 자씩 읽었다. 조선의 서거정(徐巨正·1420~1488)은 그를 '동방의 시성(詩聖)'이라고 칭송하였고, 고려의 최자(崔滋·1188~1260)는 '해와 달과 같아 감히 언급할 수 없는 문학적 천재'라는 평가를 비문 속에 그대로 인용했다.
이규보, 서거정
영당(影堂)문은 활짝 열려 있다. 다른 사당을 방문했을 때 대부분 자물쇠로 잠겨 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의외다. 반대로 다른 사당에는 주로 열려 있는 관리인이 머무는 집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백운 선생의 글을 답사 현장에서 처음 만난 것은 해인사 장경각 입구에 걸려 있는 '대장경판각 군신기고문'이다. 당시 강화도에서 만들었던 팔만대장경 조성 경위를 기록한 글이다. 그는 '글로서 나라를 빛낸다(以文華國)'는 좌우명을 지닌 관료인 동시에 '이문사불(以文事佛·글로써 불교를 받들다)'을 추구한 거사(居士)였다. 두 가지를 함께 충족시킨 문장이 '군신기고문'이다. 아들과 손자의 노력으로 어른의 글을 수집하고 판각한 덕분에 주옥같은 많은 문장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문집을 판각한 장소가 대장경 판각지와 동일하니 팔만대장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60대 중반에 퇴직한 백운 선생은 일흔 살에 돌아가셨다. 은퇴 후에도 나랏일에 고문을 맡아 대몽(對蒙) 항쟁기 때 각종 외교문서 작성에 기여했다. 정년도 없는 당시는 근력이 달리면 알아서 은퇴하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기운이 남았는지 후배 관리들에게 이런저런 간섭을 하며 살았다. 대장경판각군신기고문도 퇴직하던 1237년 66세 때 쓴 글이다. 하던 일을 은퇴 후에도 계속하면서 살았으니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삶이기도 하다.
점심 시간을 앞두고 가다가 '가정식 우동'이라는 간판을 보고 차를 세웠다. '가정식 우동'이란 말 자체가 적지 않은 위로감을 주어서다. 화학과 물리를 전공했다는 은퇴 교사 부부가 '놀기 삼아' 운영하는 곳이라고 했다. 정년퇴직 후 일본으로 가서 요리 공부를 했다고 한다. 컨테이너에 디자인을 가미한 작은 건물이다. 식당 설계자가 그렸다는 드로잉 작품으로 벽면을 심심치 않을 만큼 장식해 놓았다. 반(半)은 주방이고 탁자 세 개가 전부다. 손님끼리 서로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움이 주는 따뜻함 때문인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저절로 말을 섞게 된다. 개업한 지 몇 달 되지 않았고 두 가지 단품만 취급하는 소박한 밥집이다. 아름다운 인생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는 안주인은 후식으로 커피를 덤으로 준다. 우동 덮밥 커피로 메뉴가 바뀔 때마다 "맛이 어때요?"라며 살갑게 묻는다.
'가정식 우동' 투미투유
은퇴 후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백운 이규보처럼
마지막까지 관직에 한 다리를 걸쳐놓고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고민 없는 은퇴길일 것이다. 부부 교사처럼 요리를 배우는 방법으로 전혀 다른 길을 찾는 것도 나름 방법이다. 출가를 꿈꾸는 사람도 있다. 인생 후반기에 어떤 방식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우리 사회에 새로운 화두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실감한 하루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24/20180124032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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