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기자 신수지 기자 김지연 기자
입력 2017.06.22 03:04
[수많은 이의 '개천용 꿈' 뒤로하고… 司試, 역사 속으로]
- 낙방 부담 더 컸던 마지막 고사장
"결혼 미뤄가며 도전했는데…" "집에 로스쿨까지 부탁하기엔…"
- 67년 동안 시험 75번
첫 고시 16명·2001년 1000명 합격… 浪人 늘린다는 부정적 평가도
21일 오전 8시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이 치러진 서울 연세대 백양관 앞. 두꺼운 참고서를 팔에 낀 김정훈(51·가명)씨가 시험장에 들어섰다. 12년째 사시(司試)를 보고 있는 김씨에게 이번 시험은 '마지막 도전'이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사시가 폐지되기 때문이다. 59회 사시는 지난해 1차 시험 합격자 186명이 응시한 2차 시험과 오는 11월 마지막 3차 면접시험 관문을 넘은 50여 명이 최종 합격자로 결정된다.
김씨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젊을 때는 집안 책임지느라 바빴고, 서른아홉부터 12년간은 사시 공부하느라 결혼을 못 했다"며 "결혼은 사시 합격의 꿈을 이룬 뒤 하려고 미뤘다"고 했다. 김씨는 동생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서울 신림동 독서실에서 하루 13~14시간씩 법률 서적과 씨름했다고 한다. 그는 "고시 낭인(浪人)이라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도 꼭 변호사가 돼서 사건도 파헤치고 승소도 하고 싶었는데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라니 섭섭하다"고 했다.
이날 시험장 앞엔 고시생 자녀를 둔 60·70대 부모들의 합격 기원 발길도 이어졌다. 전남 순천시에서 올라온 노주연(64)씨 부부는 시험장 건물로 향하는 아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노씨의 아들은 8년간 사시를 쳤다고 한다. 노씨는 "사시가 이제 없어진다니 착잡하다. 우리 같은 서민이 자식 대학 4년 뒷바라지하고 로스쿨을 또 보내는 건 어렵지 않겠냐"고 말했다. 응시생들은 점심시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다. 이모(27)씨는 "더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오늘로 마지막"이라며 "로스쿨 학비 부담을 부모님에게 지울 수 없기 때문에 이번에 꼭 붙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21일 오전 제59회 사법시험 2차 시험이 치러진 서울 연세대 백양관으로 응시자들이 들어가고 있다.
2차 시험은 24일까지 나흘간 실시된다. /고운호 기자
이날 돌아본 신림동 고시촌(考試村)의 모습도 을씨년스러웠다. 한때는 고시생 2만명이 북적거렸다는 고시촌의 규모는 확 쪼그라들었다. 하루 수백 명이 들르던 복사(複寫) 전문점 손님은 하루 10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고시 관련 서적을 팔며 고시생들이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 역할도 했던 전문 서점들도 폐업하거나 공무원 시험(공시) 서적 판매로 전환한 지 오래다. 10년간 사시 공부를 하다 작년 1차 시험에 낙방한 뒤 취업한 전모(36)씨는 "작년 9월만 해도 사시가 존치될 거란 희망을 품고 공부했다"며 "이제는 다들 공시(公試) 준비 등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고 했다. 주민 이모(66)씨는 "사시 합격자가 1000명씩 되던 때엔 고시생들로 거리가 왁자지껄했다"며 "꿈을 품고 지방에서 올라와 사시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어 아쉽다"고 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사법고시'는 1950년 고등고시 사법과가 출발이다. 고등고시 체제로 16번 치렀고 1963년부터는 지금의 사법시험으로 전환됐다. 사법시험만 따지면 70만8276명이 문을 두드렸고, 그 가운데 2.9%인 2만718명이 문턱을 넘어 법조인의 꿈을 이뤘다.
△누구에겐 성공, 누구에겐 좌절… 司試, 67년만에 마지막 시험 - 1962년에 열린 제14회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 풍경. 전후(戰後) 국가 재건의 시기였던 당시의 고학생들에겐 사법고시 합격이 성공의 사다리이자‘인생역전’기회였다. 사법고시라는 '등용문(登龍門)'을 통과한 많은 인사가 법조계뿐 아니라 정·관계 등 다양한 길로 진출해 사회 지도층 역할을 했다. 21일엔 1950년 시작된 사법고시의 마지막 시험이 치러졌다. 올해 시험엔 50여 명이 최종 합격한다. 이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사시의‘마지막 증인’이 된다. /국가기록원
초창기 합격 인원은 적었다. 고등고시 사법과 1회는 16명, 사시 1회는 41명이 합격했다. 합격 인원을 정해둔 시험이 아니라 평균 60점을 넘고 과락(科落)이 없어야 합격하는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합격 인원은 1981년 23회 때 300명을 넘어섰고 2001년부터 '1000명 시대'를 맞았다가 2007년 로스쿨 도입과 사시 점진적 폐지 결정으로 순차적으로 줄어들었다. 1952년 고(故) 이태영 변호사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합격할 때만 해도 드물던 여성 합격자 비율은 2010년부터 40%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이태영 변호사
사시는 어렵게 공부한 고학생들에겐 '성공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른바 '고시 낭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자원의 편중 현상 등 부작용도 작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로스쿨 도입이 결정된 이유였다. 2009년 전국 25군데 로스쿨(3년제)이 문을 열면서 올해 6번째를 맞은 변호사 시험이 앞으로 사시를 대체하게 된다. 하지만 법률시장의 경쟁이 갈수록 격화하고, 값비싼 로스쿨 학비로 인한 논란이 계속되면서 '사시를 폐지하지 말고 로스쿨과 병행(竝行)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2/2017062200293.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커피 마시는 아침' 빼앗는 지구 온난화 (0) | 2017.06.27 |
---|---|
[Why] '현망진창' 30~40代 '앰'들의 폭발적 아이돌 사랑 (0) | 2017.06.24 |
[박진배의 생각하는 여행] 파리의 카페 ― 하나의 세계관 (0) | 2017.06.20 |
농담과 성희롱 사이 아재들의 말실수 (0) | 2017.06.19 |
[송우혜의 수요 역사탐구] 이순신을 살린 후임자의 거짓 戰功 보고 (0) | 2017.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