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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Why] '현망진창' 30~40代 '앰'들의 폭발적 아이돌 사랑

김수경 기자

입력 2017.06.24 03:02 | 수정 2017.06.26 10:52


'프로듀스 101'이 뭐길래



직장인 신유진(34)씨는 지난 5월부터 '현망진창'으로 지내고 있다고 했다. '현망진창'이란 현실과 엉망진창을 합친 말자신의 삶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신씨가 현망진창된 이유는 지난 4월 시작해 지난 16일 종영한 케이블 방송 Mnet의 '프로듀스 101 시즌2(프듀2)' 때문이다. 신씨는 프듀2 관련 동영상을 새벽까지 찾아 보다가 잠드는 일이 잦았다고 했다. 동영상을 보느라 해가 뜰 때쯤에나 잠드는 바람에 중요한 오전 회의에 늦은 적도 있다고 했다. 신씨가 열광했던 '프듀2'는 시청자들의 온라인 투표로 101명의 남자 아이돌 연습생 중 상위 11명을 뽑아 새로운 아이돌그룹을 만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마지막 방송에서 평균 시청률 5.2%로 지상파 포함,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고 온라인 동영상 조회 수 등으로 집계되는 콘텐츠 영향력지수(CPI)로는 첫 방송을 시작한 시점부터 10주 연속 1위에 올랐다. 관련 동영상 누적 조회 수는 49000이 넘는다. 이는 화제가 됐던 '응답하라' 시리즈와 '슈퍼스타K' '윤식당' 등을 뛰어넘는 기록이다.

프로듀스 101 시즌2

응답하라

슈퍼스타K, 윤식당


호화품에 현금까지 퍼주는 중년 팬들

10·20대 초반들에서 나타나던 팬 문화, 일명 '팬질' 혹은 '덕질'의 연령대가 넓어지고 있다. 20대 후반뿐 아니라 30대와 40대마저 아이돌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문자 투표로 순위가 정해지는 프듀2에서 157만8837표를 받아 1위에 오른 한 연습생의 연령별 득표율은 20대가 39%, 30대가 30%였다. 10대는 10%에 불과했다. 해당 연습생이 30대로부터 받은 투표수가 47만3651표이고, 프로그램 규칙상 문자 한 건당 득표 수 7표로 환산한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67만664명의 30대 팬들이 해당 연습생을 위해 100원의 서비스 이용료를 내면서 문자를 보냈다는 뜻이다. 30대뿐 아니라 40대와 50대의 투표율도 평균 10% 이상이었다. 정석희 TV평론가는 "이 정도로 폭발적인 투표수가 나오는 것은 10대의 팬심만으로 설명이 안 된다"며 "내놓고 말을 못할 뿐이지 40대 이상 중년 여성들도 관심이 많은 것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영역이 확장되면서 덕질 용어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한 남성 아이돌그룹의 열성팬인 고혜성(33)씨는 자신을 '○○앰'이라고 부른다. '~앰'은 아이돌의 이름과 '엄마'란 뜻의 ''이란 말을 조합한 온라인 용어다. 팬들 사이에 상대가 혹은 스스로 열성팬임을 밝힐 때 쓰인다. 고씨는 "나보다 11~14살 어린 아이돌을 '오빠'라고 부를 수는 없고 스스로 '누나'라고 칭하기도 싫다"며 "나이 어린 아이돌을 키우고 돌본다는 뜻도 갖고 있는 용어인 '앰'을 훨씬 애용한다"고 말했다. 고씨는 또 "주변에 나같이 30대 혹은 그보다 나이 많은 여성 중 아이돌 팬이 많다"며 "다들 직업이 있으니 조공을 바치거나 개인적으로 선물을 보낼 때도 1만~3만원씩 용돈 모아 보내는 학생들과는 규모가 다르다"고 말했다. 몇몇 팬들은 자신이 아이돌에게 100만원 혹은 그 이상 단위의 돈을 보냈다며 계좌 이체 내역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프듀2에 출연하는 또 다른 연습생의 광팬이라는 채주현(40)씨는 관련 동영상 조회 수를 올리는 데 한몫했다고 말했다. 퇴근한 뒤부터 오전 5시까지 프듀2 재방송은 물론이고 방송에서 공개하지 않은 영상부터 '최애(最愛·가장 사랑하는)' 출연자의 수년 전 과거 동영상까지 섭렵했다. 아침엔 집 컴퓨터로 '최애'가 나오는 동영상을 무한 반복 재생하도록 설정해두고 출근한다. 이렇게 해야 다른 출연자보다 더 높은 동영상 조회 수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씨는 "순위에 영향을 미치진 않겠지만 팬들끼리의 자존심 싸움"이라고 말했다. 해당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금요일을 '(프로듀스)요일'이라 부르며 약속도 잡지 않는다고 했다.

직장인 김보라(31)씨는 프듀2의 인기가 한창이던 5월 중순부터 카페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최애'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서다. 조공(朝貢)이란 원래 뜻과 달리 팬들 사이에서 돈을 모아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선물이나 도시락 등을 보내는 걸 뜻한다.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아이돌 연습생이지만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해당 연습생에게 선물을 보내자는 사람들이 뭉쳤다고 했다. 팬들이 계좌 하나를 정해 돈을 보내면 '총대'라고 불리는 팬 한 명이 연예인 취향과 사이즈에 맞는 옷, 액세서리 등을 골라 포장해 소속사로 선물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조공은 보통 명품 가방, 옷, 최신 노트북 등 최고가 제품들로만 보낸다. 조공을 보내는데 50만원밖에 입금하지 못했다는 김씨는 "내 샛기('새끼'를 뜻하는 은어) 옷 입히는 데 쓴 돈이라 전혀 아깝지 않다"며 "내가 사준 귀걸이를 하고 TV에 나오는 걸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현실 외면하게 하는 불편한 사회 탓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극한을 치닫는 빈부 격차, N포 세대 등 무거운 사회 분위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기보다 아이돌이라는 환상에 빠져버린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느끼는 대중이 현실에서 희망을 잃고 아이돌을 비롯한 연예인으로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동경의 대상이었던 연예인에 대한 시선이 친근하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일반인이 연예인으로 변하는 과정이 TV를 통해 생중계되면서 연예인과 일반인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열성팬 연령대도 확대됐다는 뜻이다. 다양한 연령대에서 팬덤이 늘어나는 가운데 지나친 매몰 현상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택광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팬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종교 수준으로 빠지는 것은 위험하다"며 "모든 일상생활의 기준을 아이돌 스타에 두는 것은 자아를 잃고 스스로 자신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정석희 TV평론가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     이택광 경희대 교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3/20170623016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