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준 기자
입력 2016.11.16 03:00 | 수정 2016.11.16 08:52
[하루를 편의점 쇼핑으로 마무리… 2030 '편퇴족' 늘어]
아무도 눈치 안 주는 그곳
소량 구매 때 카드 내밀어도, 밤늦게 찾아가도 핀잔 듣지않아
식사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어… 도시락 등 1인 가구 상품 많아
서울 신길동의 원룸에 사는 직장인 박모(30)씨는 매일 퇴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맥주나 과자 같은 가벼운 먹거리를 산다. 우유나 시리얼같이 다음 날 아침 대용으로 먹을 음식을 살 때도 있다. 이렇게 매일 쇼핑을 하다 보니 박씨의 집엔 편의점에서 받아온 비닐봉지만 수십 개 쌓여 있다. 박씨는 "처음엔 '무엇을 사겠다'는 생각을 갖고 편의점을 찾았는데 거의 매일 들르다 보니 이젠 '편의점 쇼핑'이 하루를 끝내는 일종의 의식(儀式)처럼 됐다"며 "아무도 눈치 안 주는 편의점에서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게 생활의 작은 낙(樂)"이라고 말했다.
지친 하루를 '편의점 쇼핑'으로 마감하는 20·30대가 늘고 있다. 퇴근길에 꼭 편의점에 들른다고 해서 '편퇴족(편의점 퇴근족)'이라고도 부른다. 편의점 업체인 CU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저녁 시간대(오후 7~10시) 매출이 전체 매출의 32.1%를 차지했다. 하루 중 가장 매출이 높은 시간대라고 한다. 지난 3년간 점심 시간(오전 11시~오후 2시)이나 야간 시간(오후 11시~오전 2시) 매출은 매년 소폭 감소하는 반면 저녁 시간대 매출은 조금씩 늘고 있다.
'편퇴족'들은 "잠깐의 쇼핑을 통해 다시 하루를 시작할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필요한 물건을 사려는 목적도 있지만 편의점 쇼핑으로 하루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서울 성산동에 사는 김유진(여·29)씨는 야식을 즐기지 않으면서도 매일 퇴근길에 편의점을 찾는다. 진열된 상품을 둘러보다가 젤리류나 커피 같은 간단한 음식 1~2개만 사 들고 집에 간다. 김씨는 "정작 이렇게 산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며칠 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을 때도 있다"며 "뭔가가 필요해서 산다기보다는 비싸 봐야 1만원이 넘지 않는 물건들을 '아이(eye) 쇼핑'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삼는다"고 말했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편의점 사회학'에서 "한국의 편의점은 20·30대 젊은이들이 식사를 간단히 해결한 다음 담배나 술 등으로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는 장소"라고 했다.
각종 도시락이나 소포장 상품 등 '1인 가구'에 특화된 상품이 많다는 게 20·30대가 편의점을 주로 찾는 이유다. 하지만 '편퇴족'들은 동네 수퍼마켓과는 다른 편의점 특유의 분위기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이들은 "밤늦게 퇴근하더라도 눈치 보지 않고 쇼핑할 수 있고, 1만원 이하의 소액을 신용카드로 결제해도 핀잔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주로 가게 주인 대신 아르바이트생이 근무하기 때문에 매일 찾아가도 같은 사람을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는 점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2030세대에겐 장점이다. 서울 당산동에 사는 정태민(31)씨는 "동네 가게를 가면 주인 아저씨가 '오늘은 이것 안 사느냐'는 식으로 말을 걸어서 부담스러운데, 편의점에 가면 '할인 카드 있으세요' 말고는 대화를 나눌 일이 없다"고 했다.
편퇴족들은 타인과의 대면(對面) 접촉을 꺼리면서도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자신이 먹은 편의점 음식을 공유하며 '쇼핑팁'을 주고받기도 한다.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에선 '편의점 음식'과 관련한 리뷰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각종 편의점 음식만 전문으로
평가하는 인터넷 블로그도 등장해 인기를 끌고 있다.
현택수 한국문제연구원장은 "편의점은 어떤 곳보다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장소라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장소"라며 "편의점 쇼핑은 '혼술·혼밥(혼자 먹는 술·밥)'에 지친 1인 가구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새로운 방식"이라고 했다.
전상인 교수, 편의점 사회학, 현택수 원장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16/20161116002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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