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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돈규의 극장傳] "유해진을 아십니까?"

박돈규 여론독자부 차장

입력 2016.11.01 03:12


코미디 영화 '럭키'의 흥행… 어둡고 무거운 세상을 웃음으로 균형 회복시켜
단역부터 올라간 유해진은 상투적이지 않은 유니크함 쌓아 '하찮은 인생이란 없다' 웅변

올가을에 가장 큰 위로를 준 배우는 유해진(46)이다. 그가 주연한 영화 '럭키'가 6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2014년 초 '수상한 그녀' 이후 오랜만의 코미디 흥행이다. 냉혹한 킬러 형욱(유해진)이 목욕탕에서 넘어져 기억을 잃고 무명배우 재성(이준)과 인생이 뒤바뀌는 이 영화를 보고 귓바퀴에 맴돈 대사가 있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유해진, 럭키, 수상한 그녀, 이준

"저를 아십니까?"

형욱은 세상을 향해 묻는다. 자신이 누구이고 뭘 하던 사람인지 아느냐고. 기억 상실은 이 영화에서 비극이 아니라 기회이고 선물이다. 그는 얼결에 분식집에서 칼 솜씨를 발휘하는 처지가 되지만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냐, 그냥 그린 기린 그림이냐"를 입에 달고 배우 훈련에 몰두한다.

보통 사람도 과거를 말끔히 지우고 삶을 리셋(reset·초기화)하고 싶을 때가 있다. 배우는 직업적으로 그게 가능하다. 이 사람 인생에 세 들어 살다 저 사람 인생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동건, 이정재, 정우성, 강동원, 김윤석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유해진은 장동건·이정재·정우성·강동원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그들은 데뷔할 때부터 정상을 밟은 스타였지만 유해진은 암벽을 타듯 이름 없는 단역부터 붙잡고 올라가야 했다. 조폭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면 한동안 조폭 배역만 들어왔다. 덤프1(영화 '블랙잭') 양아치1('주유소 습격사건') 어깨2('간첩 리철진') 넙치('신라의 달밤') 짭새('광복절 특사') 쌍칼('공공의 적')…. 대중은 유해진이 '왕의 남자'에서 육갑이, '타짜'에서 고광렬을 연기하면서부터 그를 알아보았다. '럭키' 상영관에는 웃음이 흥건하다. 사랑받는 영화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최근 무겁고 어둡고 비판적인 영화들로 기울어졌던 탓에 잃어버린 웃음을 '럭키'가 되찾아준 셈이다. 일종의 균형 회복이다. 누가 잘되면 배가 아플 수 있는데 유해진은 정반대다. 제발 잘되길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록 대중은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 보답 받기를 바란다. 인성과 노력, 연기력을 다 갖춘 유해진의 성공에는 영화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 같다.




육남매 중 막내인 그는 고교 때 청주 청년극장에서 극단 생활을 시작하며 인생의 항로를 정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꿈이었다. 친구들은 "거울은 안 보니?"라며 빈정댔다. 유해진은 대학 연극과 입시에 거듭 낙방하고 엉뚱하게 의상과에 진학했다가 군 복무 후 서울예대를 거쳐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에 들어가 기초를 다졌다.

조상건, 박영규, 한명구, 정원중, 김병옥, 손병호,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황정민(), 임원희, 장영남, 유해진, 김일우, 정진각, …. '오태석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은 이름만 나열해도 단단한 골격이 만져진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은 "배우란 레미콘을 등짐으로 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레미콘은 탱크 안에서 자갈과 모래, 물과 시멘트가 계속 돌아간다. 멈추면 굳어버린다. 배우도 그렇게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태석은 "배우에게 가장 나쁜 것은 오만"이라며 "늘 부족하다 생각하고 잘되고 있을 때 더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조상건                          박영규                           한명구                          정원중                           김병옥


손병호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황정민                         



 임원희                          장영남                         정진각                          김일우                          오태석




유해진은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는 좋은 배우가 되기 어려운 것 같다. 각본에는 작가도 메우지 못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배우는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살아 있는 인물을 구축해야 한다. 유해진은 배신했던 두목을 찾아가는 배역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아 며칠을 고민하다 두목과 같은 파마머리를 하고 나타났고('신라의 달밤'), 산적들에게 수영을 설명할 땐 "'음파~ 음파~' 이것만 기억하면 되는겨. 등신마냥 '파음~' 하면 뒤지는겨" 같은 핵폭탄급 애드리브를 지어냈다('해적: 바다로 간 산적').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윤석 선배가 '넌 애가 참 유니크(unique)해. 심지어 너는 출연료도 유니크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주연 배우들과 조연 배우들의 출연료가 다르잖아요. 저는 진짜 그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어요. 그런데 '유니크하다'는 그 말이 진짜 좋더라구요. 더 유니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유해진이 걸어온 길은 삶이 결코 행운이나 로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럭키'에 대해선 "하찮은 인생이란 없다는 메시지에 끌렸다"고 했다.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기 때문일까. 그는 자주 보아도 상투적이지 않고 유니크하다. 흔히 연극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연극이 세상을 거꾸로 비추어서 바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럭키'와 유해진을 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31/20161031027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