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 차장
입력 2016.10.25 03:12 | 수정 2016.10.25 13:52
황금 들녘 보면 눈물 나는 건 저 너머 있던 학교 때문이지
할미는 공부가 소원이었단다
늘그막에 읽고 쓰는 재미 들이니 새로운 세상이 열리더라
그 즐거움 우리 손주도 알았으면
이게 누구여. 금덩이보다 귀한 내 손주 아닌감. 왜 혼자 논둑길에 퍼질러 앉아 있누. 심심혀서 그려? 빨리 서울 올라가고자퍼서 그랴? 할미는 모처럼 우리 새끼들 내려와 좋아 죽겄는디. 내 강아지들 끓여 줄라고 읍내 달려가 올갱이도 사오는 길인디. 근디 눈이 왜 벌건겨. 벌에 쏘인거맹키로. 또 느희 에미한테 혼난겨? 공부 안 허고 스마트폰만 딜여다본다고? 아, 쉬었다 가는 날도 있어야지. 어떻게 눈만 뜨면 공부여? 지가 미국 유학파면 다여? 그 쉬운 김치도 하나 못 담그는 기. 설마 등짝도 한 대 맞은겨? 내 이걸 기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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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디 손자야. 낼모레 저승 갈 이 할미 이야기 하나 들어볼거여? 저기저 황금 들판 보이제? 돌아가신 느희 할배랑 할미가 허리가 하늘로 솟도록 일궈온 땅 말이여. 태풍도 가뭄도 버텨내고 누렇게 벼 이삭 익어가는 이맘때면 기뻐서 어깨춤이 나야 하는디, 이 할미는 가슴에 바람 한 줄기 휘잉 뚫고 지나가듯 설웁기만 하니 이상도 허지. 아마도 저기 저 붉은 벽돌담장 때문인게벼. 저 너머 초등학교 보이지? 저기를 이 할미가 을매나 댕기고 싶었는지. 근디 부모님이 안 보내줘. 큰오빤 장남이니 대학 가야 허고, 큰언니는 입 하나 던다고 열여덟에 시집가고, 둘째 언니는 가수 된다고 서울로 내뺐으니 집에 일할 사람이 있어야지. 친구들은 여덟 살 되고 아홉 살 되니 세라복 입고 학교 가는디 이 할미는 일 나간 엄마 대신 부엌서 밥 짓고 빨래하고 어린 동생들 업어 키웠어. 가을 운동회 날엔 그 서글픔이 곱절로 찬란혔지. 파란 하늘에 만국기 펄럭이고 아이들 고함 소리 우렁찬디, 나는 허수아비처럼 들판에 양팔을 들고 서서 새들을 쫓고 있었단 말이지. 달리기 시합을 하는지 '땅!' 소리 나면 할미 가슴도 쿵 떨어지고, 계주를 하는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 소리 째질 땐 담벼락에 모가질 빼고 구경을 했어. 그러다 확성기 타고 교가가 울려 퍼지면 목젖까지 차올랐던 설움이 봇물로 터져설랑, 새참으로 먹던 감자를 내던져불고 논바닥에 퍼질러앉아 앙앙 울었지 뭐냐. 야속해서, 부모님이 밉고 또 미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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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가 여고 나온 거 아니었냐고? 느희 아부지가 그랴? 서울 장모가 입만 열면 이대 나왔다 자랑이니 어지간히도 꿀렸는갑네. 학벌이 뭐 대수라고. 거룩한 대학총장님도 권력에 기대 경거망동하다 된서리 맞고, 천하의 검사님, 대기업 회장님도 검은돈에 엮여 줄줄이 잽혀가는 거 못 보는가. 기왕 배울 거 올곧게 배워야지. 할미가 진작에 배웠으면 여기서 올갱이국이나 끓이고 있겄냐. 메르켈보다도 대찬 여걸이 되어설랑 남북통일을 열 번도 더 이뤘을 것인디. 김정은이는 이 갈퀴 같은 할미 손에 딱 한 줌인 것을.
그렇잖아도 요즘 할미가 공부의 즐거움에 푹 빠졌지 뭐여. 영어도 배우고 콤퓨타도 배우고 우리 역사도 배우는디 아주 재미나 죽겄어. 지난 봄부텀 고전 읽기반에도 다니는디, 성현들이 그 좋은 말씀을 언제 그리 많이 남기고 돌아가셨다냐? 누가 소원을 들어준다 하면 내 목숨줄보다 딱 3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 것인디. 원 없이 읽고, 원 없이 써서 밥 딜런인가 국 딜런인가 하는 사람맹키로 노벨상 한 번 받고 죽으면 여한이 없겄는디. 아이코, 우리 손자가 웃네. 할미 말 어이없어 눈물 뚝 그치고 햇살처럼 웃네. 웃어야지. 삶이란 눔이 암만 짓궂어도, 덤벼라 이것들아 하고 배짱을 퉁겨야 사내지.
메르켈, 밥 딜런, 퀴리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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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힘들지. 사람들 말 들어봉께, 요새 학교선 가르쳐주는 것도 없이 시험은 퀴리 부인도 내뺄 만큼 어렵게 낸다문서. 읽어야 할 책이 태산이라 초장에 포기하는 애덜이 지천이람서? 근디 손자야. 농사에 때가 있듯 배움에도 때가 있는 법.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고, 인생에 한 번은 책이랑 드잡이하면서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 악물고 싸워보는 날도 있어야 허능겨. 최선을 다했는디도 안 되면 말고지. 대학 졸업장 없어도 숨쉬는데 지장 없응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나니, 그 또한 인생! 요즘은 똑똑한 박사님덜도 농사를 짓겄다고 시골로 내려온다 안 허냐. 돈과 명예가 행복을 가르지 못하나니, 우리 손자도 농사에 뜻있으면 언제든 할미한테 오거라. 농사일로 치면 내가 박사학위 스무 개는 더 땄을텡게. 에이아이(AI)가 죽었다 깨도 모르는 비법을 알려줄랑게.
그나저나 이거 할미가 지은 시(詩)인디
들어볼 거여? 미완성작이라 좀 거시기는 헌디 한번 들어봐. '비 온 뒤 담장 아래 수줍게 핀 채송화/ 열여덟 울면서 시집간 우리 큰언니 닮았네/ 밤하늘 별들도 논두렁이 잡초도 앞앞이 이름이 있건만/ 평생 자식 위해 지아비 위해 산 여인네들 이름은 어디에/ 나 다시 태어나면 저 하늘 별이 되리라/ 저 들판 꽃이 되리라….' 워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0/24/201610240335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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